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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첨부파일    
 자료구분    작성일  2004-07-29
 제목  <특집-주제강의 3> 아시아의 무슬림에 대한 기독교 선교 고찰
 주제어키워드  특집-주제강의 3  국가  
 자료출처    성경본문  
 조회수  4877  추천수  14
아시아의 무슬림에 대한 기독교 선교 고찰



세계의 인구는 지금 62억 4백만 명이다. 그 중에 33%는 기독교인들이다. 기독교의 인구와 무슬림의 인구는 각각 2억 5백만, 1억 2천 4백만이다. 세계의 인구 증가율은 1.22%인데 무슬림은 2.11%이며, 기독교인은 1.27%이다. 대략 42만 9천 명의 기독교 선교사가 있고, 그들 중에 2-3%만이 미전도지역에서 일하고 있다. 개신교 선교 비용의 분배상황을 보면 그 돈의 74%는 명목상의 기독교인을 전도하는 일에 쓰여졌고, 오직 6%만이 무슬림을 전도하는 일에 사용되었다. 한 사람을 개종시켜 세례를 주기까지 드는 평균적인 선교비용은 다음과 같다. 아프리카(14k), 아시아(61k), 라틴 아메리카(145k), 오세아니아(634k), 유럽(993k), 미국(1.5 million).

확실히 이런 숫자들을 볼 때 전체적으로 무슬림에 대한 기독교 선교는 매우 작은 부분만 차지한다. 그러나 이 숫자는 이슬람 내부에서의 움직임과 그것에 대한 인식이 얼마만큼이나 이슬람에 대한 기독교의 관심과 선교를 불러일으키고 있는지는 보여주지 못한다.

오늘날 무슬림 선교의 성공과 개종자의 숫자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만약 성공이 숫자로 평가된다면, 비롯 무슬림들 중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본토인이건 국외 추방자이건)이 조직을 만든다는 이야기가 나오지만 여전히 무슬림 선교는 수적으로 열세에 있다. 무슬림들에 대한 선교의 많은 부분이 아프리카에서 일어나고 있지만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역시 본토와 해외의 선교사가 선교단체가 고르게 분포되어 있다.

이슬람에 대해 현재 기독교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도 활동의 범위는 다음의 두 가지 방식으로 평가될 수 있다 .



1. 무슬림 종족집단에 대한 기독교적 관심

기독교의 선교는 자신을 종족적이고 부족적인 정체성을 통해 정의내리기 때문에 전통에 속해 있는 무슬림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듯하다. 이 집단은 기독교와 무슬림이 공히 개종시키려고 경쟁했던, 민속종교를 믿던 원주민들에 대한 선교를 다시 반복해야 할 대상이다. 종족적 정체성은 역사적 종교 정체성(기독교인, 무슬림)보다 강하다고 말해진다. 이런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기독교 선교는 이들이 여러 가지 속박으로부터 ꡐ자유ꡑ를 얻어야 한다는 명분에서 정당화된다. 이슬람의 주변부에 위치하면서 이 집단은 상대적으로 규범으로부터 자유롭다. 그들은 따라서 그들을 이슬람화하려는 무슬림의 노력에 대해서는 하나의 도전이 되면서 동시에 이슬람교와 규범적으로 약하게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려는 기독교 선교사들에게는 하나의 기회가 된다. 기독교 선교사들은 그들을 상대적으로 선교하기 쉬운 집단으로 본다. 그러나 무슬림 선교사들은 그들을 이슬람화의 대상(이슬람의 중심으로 편입되어야 할)으로 본다.



주변적인 무슬림에 대해 기독교가 선교적 관심을 갖고 있다는 증거는 몇몇 기독교 선교단체에서 발견되는 무슬림 집단의 목록에서 알 수 있다. 인도네시아에는 2억 5천만의 무슬림이 있지만 기독교 선교사들은 오직 아첸사람들(수마트라 섬의 3백 십만 명), 부기스인(술라웨시의 3백 십만 명), 마두라스인(마두라와 자바, 인도네시아의 천백 2십만 명), 마카사인(술라웨시 지역의 백 칠십만 명), 마낭카바우인(수마트라의 7백만 명), 순단인(자바의 2천 7백 만명)에게 관심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인도와 파키스탄에는 2억 5천만의 무슬림이 있는데 기독교 선교사는 주로 델카니(천백칠십만 명), 신디(천팔백만 명)에 관심이 있다. 마찬가지로 아제르바이잔, 이란, 터키 지역의 아제르바자니스(천팔백십만 명), 인도의 후이(구백십만 명)에 관심이 있다. 또한 태국과 말레이시아, 브루네이, 싱가폴, 인도네시아의 말라이족(천이백만 명 이상)에 관심이 있다. 중국의 서북쪽의 우이후어(칠백육십만 명)나 중앙 아시아와 아프가니스탄의 우즈벡인들(이천백만 명) 등이 있다.



2. 무슬림에 대한 선교적 접근

대부분, 기독교 선교는 대개 이슬람과의 대면을 회피한다. 역사적으로 두 개의 종교는 매우 선교지향적이었다. 두 종교는 진리에 대한 절대적인 선언에 기반해 있다. 그런 이유로 인해 과거의 접근방식이 계속해서 현재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 선교 자체는 거대한 변화를 겪었는데 이런 변화는 무슬림 선교의 다양한 표현방식안에 반영되어 있다.



첫째, 과거와 같이 기독교인과 무슬림들은 자신의 선교대상자를 선택하고 있다. 남 아시아(또한 아시아의 모든 지역)에서는 무슬림은 민속 이슬람에 본체에 직면해오고 있다. 이슬람화는 타블리아 알자마아트아 같은 전도조직의 주된 주제이다. 남 아시아 사람들의 집단개종은 요즘에는 무슬림의 지속적인 선교노력으로 이뤄지지 않고 억압받는 계급의 사회적 반항행위로서 이뤄지고 있다. 그와는 달리 아시아에서 무슬림과의 기독교의 선교는 주로 부족과 다른 주변적 계층의 사람들에게 이뤄지고 있다. 이런 사람들 사이에서의 선교가 개종자의 숫자의 측면에서 볼 때 가장 성공적이었다.

둘째, 과거의 전통을 따르면서 고전적인 논쟁술의 유산을 지속하고 있는 서구의 선교 조직이 소수 존재한다. 이 조직의 특징은 다양한 본토 기독교인들을 훈련하여 자신의 동료인 무슬림을 구해내도록 하는 일에 있어 인격적 접근을 덜 활용한다는 점이다. 다음의 인용구가 그것을 설명한다.

「기독교 선교는 반드시 훨씬 더 많은 돈을 이슬람 선교를 위한 센터를 짓는데 투자해야 한다. 그리고 변증적인 기독교 관점에서 이슬람을 더 연구하는데 투자해야 한다. 그런 센터는 지역의 선교사들을 훈련시켜 자신과 문화적이고 종족적인 유사성을 갖고 있는 자국민이나 무슬림 집단에서 전도하도록 해야 한다. 따라서 미국이나 유럽의 선교사를 내보내서 말레이시아 무슬림 집단들 속에서 일하도록 하는 것 대신에 인도네시아나 필리핀의 기독교인을 통해서 그 일은 더 잘 수행 될 수 있다. 터키인들 사이에서는 한국의 기독교 사역자들이 서구인들보다 더 나은 성과를 가져올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인과 터키인들은 알타이어를 사용하는 대가족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것에 덧붙여서 제 3세계의 기독교 사역자를 활용하는 것은 백인 선교사를 사용하는데 드는 돈의 1/100정도만 들 것이다. 」

셋째, 총체적인것(선행과 복음의 선포)으로 이해되는 선교는 적어도 아시아의 가난하고 갈등으로 점철된 지역에서 이뤄져야 할 선교의 양을 강조한다. 전쟁이나 갈등의 극단적인 상황에서 자선행위는 그 뒤를 따른다. 학자들은 서구 세계가 이슬람에 관심을 갖는 이유들을 주목하고 있다. 그것은 전통적인 냉전의 적(아프카니스탄의 러시아)과 화해하고,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팔레스틴의 유대인)과의 유대관계를 표현하고, 무슬림의 근본주의자들에게 계속적으로 무언가를 가르치고, 테러 공격에 대한 우위적 자리를 선점하여 세계에 대한 통제권과 우월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헌팅턴의 문화적 분석(이슬람과 기독교 사이의 고유한 갈등에 대한)은 전쟁을 ꡐ해방ꡑ, ꡐ민주주의ꡑ, ꡐ자유ꡑ를 위한 것으로 합리화하는 서구의 논리를 강조한다. 많은 비서구 학자들은 해방전은 이슬람에 대한 기독교의 전쟁으로 간주한다. 그런 상황에서 과도하게 수행되는 자선행위와 기독교적 인도주의 단체들은 ꡐ이런 자선을 통해 기독교 선교를 효과적으로 하려는 목적에서 전쟁이 시작되었구나ꡑ하는 인식을 강화시킨다.

아시아의 많은 국가에서 기독교적 단체들은 인도주의적이고 사회적인 사업을 통해서만 선교를 하려고 한다. 그런 나라의 선교사들은 선생, 의사, 사회복지사, 구호나 발전 담당 사역자등으로 일한다. 그렇게 하면서 비밀리에 기독교 복음을 선포한다.

넷째, 휴가나 자유시간을 통해 단기선교를 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이런 것들은 휴일이나 모험의 즐거움을 선교열정과 조화시키려는 노력이다. 예를 들어서 ꡐ트레킹 팀 패키지ꡑ(2650달러)는 선교사들에게 무슬림 마을 사람들에게 전도하기 위해 노새를 타고 산을 넘는 코스를 약속한다. ꡐ기도 팀 패키지ꡑ는 고고학적 발견의 자리를 탐사하고 무슬림에게 전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ꡐ동남아시아 자전거 사역팀ꡑ은 동남아의 산들을 자전거로 돌며 ꡐ그 땅과 백성을 위한 기도ꡑ,ꡐ전도ꡑ, ꡐ지역 무슬림과의 관계 형성ꡑ을 위해서 기도하게 한다.

다섯째, 이슬람권에서 일하는 선교학자들은 이슬람에 대한 접근법을 개발하기 위해 사회학적이고 인류학적인 통찰을 사용한다. 종교 내부의, 종교 간의 ꡐ접촉지역ꡑ에 대한 이론에 의하면 종교 내부간의 집단들 사이의 신학적이고 문화적인 유사성은 접촉과 융합을 촉진한다. 이것은 어떤 기독교 선교 지역에서는 ꡐ무슬림처럼 되면 무슬림에 접근할 수 있다ꡑ는 믿음으로까지 이어진다. 이것은 무슬림처럼 살고, 옷입고, 언어를 배우고, 예배의 형식을 받아들이고 이슬람과 비슷한 교리(하나님은 없고 하나님과 이사가 그의 메시야이다 등)를 수용하는 것이다. 이런 접근법을 채용하는 부분적인 이유는 자신을 무슬림의 위협에서 보호하려는 보호의지이다. 이슬람 지역에서 인도네시아만큼 정교하게 이런 접근법이 다듬어진 곳은 없다.

여섯째, 선교에 대한 다른 접근은 종교에 대한 자유를 위한 로비작업과 관련되는데 그것은 기독교인으로서 예배를 드릴 자유를 얻자는 것 외에도 선교의 자유를 위한 것이다. 무슬림 국가들은 기독교 선교가 자신들의 종족적이고 종교적인 정체성을 뒤흔든다는 명목 하에 기독교 선교에 대해 닫혀 있다. 정부 역시 개종을 가로막고 있다. 어떤 미국인 기독교 선교단체는 무슬림 나라에거 ꡐ핍박받는 교회ꡑ에 대해 더 많은 자유를 달라는 기치 하에 이런 제약조건을 와해시키려 로비작업을 했다. 그들의 로비는 종교자유에 대한 위원회가 구성되게 도왔으며 그 위원회는 다른 소수민들의 안건도 받아들이는 식으로 약간 의미가 퇴색되었지만 이해할 수는 있다.

일곱째, 재세례파의 전통에서 떠오르는 방식은 하이더라바드라는 고대 이슬람 도시에서 시행되었던 평화로운 공적 대화를 인정하는 것이다. ꡐ그리스도의 강권적인 사랑ꡑ은 이런 접근법의 주된 동기라고 말해진다. 그것은 이슬람의 도전에 대해 기독교인의 반응이 이분화된 것을 극복하려고 한다. 공격적이고 논쟁적인 반응과 복음의 진리에 대한 절대적 믿음이 없는 반응이다. 이런 접근은 기독교인이 무슬림과 공적인 장소에서 만날 것을 옹호하고(무슬림이 초청했을 때), 그 때 비록 예수에 대한 성경과 기독교의 전통들이 비판을 받더라도 복음을 명확하고도 평화롭게 전해야 한다고 본다. 그것의 산물로서 이런 만남은 무슬림의 조직가들과 개인적이고 시간적으고 연장된 만남의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여덟째, 특정한 접근법은 ꡐ기독교인으로 살기ꡑ에 대한 강조를 포함한다. 데이빗 쉥크는 그의 책에서 말씀과 복음증거와 관련되는 두 가지의 다른 방식이 있다는 식으로 이런 접근법을 그려내고 있다. 결국 하나님과의 평화는 말씀에 대한 지식대로 사는 것으로 통해 중재될 뿐인데 쉥크가 내세운 두 가지의 방식은 코란과 예수 그리스도이다. 기독교인적으로 사는 것의 경험적 예는 방글라데시(85%가 무슬림)에서 나온다. 방글라데시에서 카톨릭 선교는 이것을 이미 지역적 웃음거리가 된 침례교나 SDA의 경쟁적이고 문화적, 종교적으로 무감각한 선교방식에 대한 대안으로 생각한다. 무슬림이 이미 예수를 코란의 메시야로 알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인의 삶에서 감동받는다면 스스로 성경의 예수에 대해 더 알고자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접근법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예수처럼 살겠다는 의지를 말씀과 분리시킨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되고 기독교인과 무슬림이 자신의 전통 안에서 그리스도처럼 되는 것이 가능하다.

이런 접근법은 주변적이거나 소수의 무리로 존재하는 그룹들 사이에서 희생적으로 살아가는 기독교인의 위대한 예를 지지한다. 그 예는 태국 남부 지역 같은 곳이다. 불교가 태국의 다수를 형성하고(94.8%), 무슬림은 이 지역에서 4%를 차지하고 기독교인은 0.6%존재한다. 구스타브 루슨스라는 살레시안의 사제는 그들 가운데에서 13년간 살아왔다. 그는 세상으로 하여금 그들의 잘 알려진 폭력, 가난, 교육부족, 이류국민이라는 의식 이외의 그들의 다른 모습을 보도록 하였다. 인도에서 소수 이슬람인들 중에 살면서 그들이 힘들 때 방패막이가 되어주는 기독교인들이 겪는 위험의 예가 많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태국이나 인도 같은 곳에서 무슬림과 함께 삶으로써 소수민인 무슬림의 의식을 공유하는 것은 예수님의 성육신이 성취하고자 했던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더 어렵고 위험스러운 시도이기는 하다.

아홉째, 코란의 중심에는 선지자와 예언이 있지만 코란에 내재해 있는 발전의 요소를 가리키는 것들이 있다. 성경은 모세가 율법을 중재했고, 예수가 인성을 바로 하나님께 연결시킴으로써 그것을 완성했다고 증언한다. 이런 접근법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과연 코란은 완성이라는 사상을 드러내고 있는가? 수피인들은 모세가 하나님의 직접적인 현시로부터 계시적 지식을 얻으려고 이름을 모르는 사람을 찾아 나섰다는 코란의 18장 60절에서 62절의 내용을 사용한다. 이런 이야기는 무슬림들에게 계시의 대리자가 다수일 수 있다는 시각을 제공하는데, 그 대리자는 선지자(나비)나 성자(왈리)이다. 어떤 이슬람 전통에서는 이들 사이의 주도권이 서로에게 넘어가는 상황에서 양자 사이의 갈등이 보이지 않는다. 이것에 근거하여 쿰란의 무명의 성자를 통해 법의 완성이 이뤄진다는 조짐이 보이며, 이것이 대화의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쿰란에도 율법을 완성하고 다른 사람을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로 이끄는 스리스도에 대한 언급이 있다는 것으로까지 연결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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