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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첨부파일    
 자료구분    작성일  2001-11-23
 제목  <이상규 교수가 쓰는 선교역사(마지막회)> 선교단체의 성립
 주제어키워드  이상규교수가 쓰는 선교역사  국가  
 자료출처    성경본문  
 조회수  5278  추천수  12
런던선교회(LMS)의 창립(1795)

침례교선교회(BMS, 1793)에 이어 두 번째로 조직된 선교단체는 런던선교회였다. 이 단체의 조직에 공헌한 인물로는 가스포트의 회중교회 목사인 데이비드 보그(David Bogue, 1750-1825), 알드윙클의 복음주의파 교구목사인 토마스 하웨이스(Thomas Haweis, 1734-1820) 그리고 부리스톨의 로란드 박사 등이었다. 로란드 박사는 윌리암 케리가 보낸 편지를 읽고 그 편지를 다시 보그에게 보냈는데, 이 편지에는 선교를 위한 특별한 모임을 부탁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은 하웨이스와 함께 브리스톨에 있는 교회당 응접실에 함께 모여 기도하고 해외선교를 위해 의논했는데 이것이 런던선교회 창립의 연원이 되었다. 이 모임 이후 보그는 [복음주의 잡지](The Evangelical Magazine)를 창간했는데 이 잡지는 런던선교회 창립에 주요한 역할을 감당하였다. 1794년 11월 데이비드 보그를 비롯하여 런던의 독립교회 목사인 조셉 부룩스뱅크, 런던의 스캇치(Scotch)교회 목사 존 러브 등 다양한 교회, 신학 배경의 사람이 모여 선교회 조직을 협의하였고 1795년 2월 17일 아래와 같은 내용의 성명서를 채택하고 서명하였다.



우리의 이름을 여기에 서명하고,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위대한 사역을 증진시키기 위해 우리의 뜨거운 열망을 선언한다. 그리고 이 의식은 이방 세계로, 빛이 비취지 않는 나라로 전하여져서 그들과 함께하며 우리의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여 복음주의 목사들과 모든 종파로 이루어진 평신도 형제들로 구성된 선교회가 정식으로 조직되고 확장되도록 하며 선교회의 목적은 이러한 중요하고도 영광스러운 계획을 이루기 위하여서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추구할 것이다.



이 선교회는 이방 땅에 영원한 복음을 전한다는 고매한 목적을 가지고 시작되었는데, 이 선교회의 첫 30명의 선교사는 1796년 남태평양의 타히티로 파송되었다. 30명의 선교사 중 안수받은 선교사는 오직 4명뿐이었고 나머지는 각종 기술자였다. 이곳에 첫 선교사를 보내게 된 것은 이곳이 영국의 식민지였기 때문이었다(이곳은 1842년에는 프랑스식민지가 되었다). 그래서 런던선교회의 첫 사역지는 남태평양 지역이었다. 두 번째 선교지역은 아프리카였는데, 남아프리카에 파송된 개척 선교사는 반델켐프였다. 그 외에도 존 필립(John Pillip, 1775-1851), 로버트 모펫(Robert Moffat, 1795-1883), 데이비드 리빙스톤(David Livingston, 1813-1873) 등이 런던 선교회로부터 파송받은 이 지역 선교사들이었다. 세 번째 선교지는 중국이었다. 런던선교회의 중국선교는 로버트 모리슨(Robert Morrison, 1782-1843)으로 시작되었다. 1807년 파송된 모리슨은 1813년에는 중국어로 신약을, 1818년에는 성경전서를 번역하였고 중국어 문법책을 비롯하여 약 20여 권의 중국선교관련서적을 저술하기도 했던 위대한 인물이었다. 런던선교회 소속으로 중국에 온 선교사 중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물은 로버트 제레마인 토마스였다.

그는 1863년 12월 갓 결혼한 아내와 함께 중국 상해에 도착하였다. 아내와의 사별, 상해선교부 책임자인 윌리엄 무어헤드와의 불화 등으로 1864년 12월 선교사직을 사임한 일도 있었으나 1865년 비밀히 조선을 방문하였고 이듬해인 1866년 재차 입국하여 조선에서 순교하였다. 런던선교회는 이 외에도 인도 등지에도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런던선교회는 처음에는 초교파적인 단체로 출발했으나 곧 침례교 선교단체가 되었다. 이 단체는 1977년 The Council for World Mission으로 개편되었다.



영국교회선교회(CMS)의 창립(1799)

점차 선교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영국성공회의 복음주의자들은 해외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1799년 또 하나의 선교단체를 조직하였는데 이것이 영국교회선교회이다. 이 선교회는 국교회의 저교회 인물들인 헨리 벤(Henry Venn, 1725-1797)과 클레펌 교구 목사인 그의 아들 존 벤(Jonh Venn, 1759-1813), 노예제도 폐지를 주창하였던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 1759-1833), 그리고 가정성경(Family Bible)의 편집자 토마스 스코트가 중심인물이었다. 이들은 클레펌이란 지역의 부유한 이들로서 선행을 격려하고 사회개량운동, 노예제도 폐지운동, 그리고 선교운동을 주도하였기에 흔히 ‘클레펌파’(the Clapham Sect)라고 불렸다. 이 단체는 웨슬레 운동에 찬동하면서도 영국국교회로부터의 분리를 반대하고 국교회에 남아 있었는데 이들은 후일 국교회내의 부흥운동을 주도하였던 그룹이었다. 윌리엄 윌버포스는 존 뉴톤(John Newton, 1725-1807), 토마스 클라크손 등과 함께 노예제도를 반대하고 이의 폐지를 위해 깊이 관여하였다. 특히 윌버포스는 존 뉴톤의 교회에 출석하고 있었는데 뉴톤은 그 자신이 한 때 노예선의 선장이었으나 1748년 선상에서 심한 풍랑 중에 회개하고 1764년 목사가 되어 1780년부터는 런던의 성 메리 교회의 목사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사회개혁운동만이 아니라 복음주의 선교운동에도 관심을 가지고 존 벤과 함께 영국성공회의 가장 대표적인 선교단체인 영국교회 선교회의 창립에 기여를 하였다.

이들은 “불신자 사이에 복음에 관한 지식을 보다 효과적으로 증진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방법을 사용할 수 있는가”를 진지하게 논의하기 시작하였고,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협의하는 가운데 선교단체를 창립하게 되었다. 이들은 1804년에는 대영성서공회(British and Foreign Bible Society) 창립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대영성서공회는 클레펌파에 속한 사람들이 낸 기부금으로 설립되었다.

이 선교단체는 영국국교회의 SPG(1701)와 선의의 경쟁을 벌이면서 선교사역을 감당했는데, 선교사의 자격에 제한을 두지 않았다. 따라서 나이가 어리고 교육을 받지 못한 많은 선교사들이 있었다. 1815년부터 1891년까지 영국교회선교회가 파송한 650명의 선교사 중에서 대학교육을 받은 이들은 240명에 지나지 않았다. 교육정도를 선교사의 자격으로 문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선교부의 가장 중요한 선교지역은 인도, 아프리카, 중국이었다.

영국교회선교회의 창립회원으로 선교정책가였으며 당시 이 선교회의 총무였던 헨리 벤은 소위 선교에 있어서 3-S 원리를 주창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이미 1854년 선교의 목표는 자치적이고(self-governing), 자립적이며(self-supporting), 자전하는(self-propagating) 토착교회를 설립하는 것이 목표라고 주장하였다. 당시의 일반적인 서구인들의 우월의식의 실제를 고려해 볼 때 이는 선견지명이 있는 주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당시 서구인들은 아아제국의 나라나 민족들에 대해 우월하다는 의식, 일종의 식민주의 의식(colonial complex)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구미선교사들은 선교지에서 가능한 오래 그 지도력과 주도권을 행사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아직 아아제국의 사람들은 개화되지 못했고, 자치 능력이 없고 자립할 만한 여건이 되지 못한다고 보았다. 당시 영어권에서 많은 선교단체는 아아 제국에 대한 선교를 ‘해외선교’(foreign Mission)라고 하지 않고 ‘이교국 선교’(Heathen Mission)라고 불렀던 점은 이 점을 반영하고 있다. 호주장로교회의 경우 ‘이교국 선교’를 ‘해외선교’라는 용어로 부르기로 결정한 것은 1910년부터였다. 이것도 1910년 에딘버러에서 열렸던 세계선교협의회(IMC)의 결정에 따른 것이었다. 따라서 선교사들은 피선교지의 주도권을 행사해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런 와중에서 헨리 벤이 그 반대적 주장을 했던 것은 가히 혁명적이었다. 그는 자치(自治), 자급(自給), 자전(自傳)만이 아니라 “선교부의 안락사”라는 용어를 썼다. 선교부는 토착교회를 세우고 일정 기간이 지나면 조용히 물러가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 점에 대해 스테판 닐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선교부가 일단 교회를 세우면 그 선교부는 그 지역에서 없어져도 좋을 것이다. 선교사들은 복음이 들어가지 않는 곳으로 가고, 그들이 세운 교회는 성령의 지도아래 교회의 모든 기능을 발휘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선교부와 토착교회와의 관계를 그처럼 뚜렷하게 구분하는 것은 다소 문제가 있을 수 있으나 선교사역은 토착교회를 세우는데 일차적인 과제가 있음을 헨리 벤은 깨우쳐 주었다. 선교부와 토착교회에 대한 다음의 글은 주목할 만 하다.

선교부는 분명한 두 가지를 보여준다. 선교는 외국인의 일이지만, 교회는 토착민을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 선교신학은 이 점을 지지해 준다. 선교는 토착교회를 세우기 위한 보조물이다. 그러나 교회가 세워지면 보조물은 철거되고 다른 곳으로 옮겨가 사용된다. 통상 보조물은 본래 예상보다 더 오래 남아있게 되는데, 선교이상은 선교지의 신생교회에 잘 전달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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