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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첨부파일    
 자료구분    작성일  2000-11-29
 제목  <북한선교> 탈북일기
 주제어키워드  북한선교1  국가  
 자료출처    성경본문  
 조회수  3203  추천수  6
나는 1974년 1월 7일 가난한 노동자의 집에서 태어났다. 4동생을 둔 집안의 가장으로 태어나 어린시절을 보냈다. 철이 들어 세상이 얼마나 어려운지도 알았고, 나를 그 땅에서 태어나게 한 나의 부모들을 원망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내가 18살 되던 해 어머니를 잃고 집안 살림을 내가 유지해 나가야 했다. 그런대로 2년은 또 흘려보내고 20살이 되면서 아버지도 세상을 떠났다. 나 혼자 동생들을 먹여살리기가 정말 어려웠다. 아버지가 있을 때는 그런대로 마음을 의지할 기둥도 있고하여 그럭저럭 살았는데 아버지마저 잃고나니 정말 살길이 망막하였다.



두만강을 건너



이리하여 나는 집안의 모든 살림을 여동생한테 맡기고 1998년 3월 21일 정든 고향을 떠나 중국으로 두만강을 건너게 되었다. 중국에 와서 첫 발을 내딘 것이 연길 기독교였다. 여기서 나는 하나님을 알고 인민폐 200원을 가지고 일자리를 찾아 떠났다. 내가 제일 처음 일자리로 얻은 것이 길성이라는 농촌이었다. 거기서 일을 하게 되었는데 2달가량 일을 하면서 깨달은 것이 아무리 일을 하여도 북조선에서 온 것으로 인하여 돈을 받지 못하리라는 것이었다. 또 멸시와 수모를 받고 더는 살 것 같지 못하여 그 집에서 나와서 무순이라는 곳에서 또 일자리를 얻었다.



조국으로



무순에서 그런대로 1년을 일하고, 두고온 동생들 생각에 번 돈을 가지고 집으로 갈 목적으로 연길로 오게 되었다. 일이 되지 않으려니 그만 연길시 천남에서 연남 파출소에 잡히게 되었다. 연남 파출소에서 하루를 보내고 연길 감옥으로 이간되어갔다. 99년 6월 24일까지 1달가량 구류되어 있었다. 연길감옥에서는 정말 편안했다. 나는 6월 25일 우리 형제들 11명과 자매 3명 총 14명과 함께 룡정감옥으로 이간되어갔다. 룡정감옥은 연길감옥보다 못하였다. 그런대로 3일동안 있다가 28일 사마부교두로, 조선에서 회령으로 두만강을 건너 조국으로 가게 되었다.



조국에서의 첫생활



교두를 넘어 나의 조국인 회령 보위부에서 우리는 모두다 피를 뽑았다. 중국에서 나쁜 병을 가지고 왔다고 피검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1명씩 개인 신문을 하는 것이었다. ‘중국에 언제 갔으며 또 무엇을 하였는가’, ‘기독교에 가지 않았는가’ 등 여러 가지를 물어본 후 회령시 단련대로 갔다. 다음날인 6월 29일 나의 일생에 영원히 잊지못할 그날, 우리는 아침 5시에 기상하여 세수 및 정돈, 마당쓸기 등 1시간 가량 식전 작업을 마치고 아침을 먹었다. 단련대에서의 식사는 국에 밥 120g 정도, 이것이 회령 단련대의 식사였다.

우리는 그날 아침을 먹고 마당에 모여 회령시 시장 앞 개울에 줄을 서서 갔다. 조금 있으니까 회령시에 모든 사람이 다 모인 듯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더니 조금 있다가 12명을 사형하는 사형식을 하는 것이었다. 12명중에는 중국에서 기독교, 하나님을 믿고 간 사람 3명과 집사 7명, 국가의 돈을 탐한 어느 한 공장의 회계 2명, 이렇게 총 12명을 총살하는데 그 중에 여자가 6명, 그중에도 시집을 안 간 21살 짜리 처녀 2명을 총살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날 점심과 저녁을 먹지 못하였다. 총살할 때 한사람당 12발의 총알을 쐈는데, 세발을 머리에 쏘았다. 그 머리에서 뇌수가 터져 나온 것을 보고, 너무도 메스꺼워 견딜 수가 없었다. 너무도 끔찍한 사형에 그날 밤 나는 잠을 자지못하고 온 밤을 울었다. 눈물이 아니고 핏물이 흘러 나왔다. 회령 단련대에서는 타지방 사람들은 일을 시키지 않고 밥먹고 온종일 학습을 시켰다. 왜냐하면 타지방에서 왔기에 도망칠까봐 그런 것이었다. 회령에서 일주일간 있다가 7월 5일에 청진에 있는 도 집결소로 이간되어 갔다.



치욕스러운 나날들



우리는 도 집결소로 이간되어갔는데, 거기에서의 생활은 정말로 짐승보다 못한 생활이었다. 7월은 여름에도 제일 더운 시기다. 집결소는 길다란 복도에 방이 3칸이 있는데, 보통 1칸에 40명 내지 35명씩 들어 있고 복도에 50명 누워있었는데, 복도에 있는 사람들은 거의 죽어가는 사람들이었다. 도강한 사람들, 신의주, 함흥 이렇게 먼지방 사람들은 기차가 제대로 다니지 못하여 자기 고장으로 가지못한 채, 청진 집결소에서 죽는 사람이 하루에도 몇 명씩, 정확히 말하면 집결소에 십일동안 있었는데, 한번은 9명이 단번에 죽었고, 또 3명이 집결소 복도에서 숨졌다. 죽은 사람들은 우리들이 묻어 주는데, 달구지에 실어서 뒷산에다 묻었다.

더욱이 분하고 놀라운 것은 중국에 시집을 갔다가 임신을 하고 온 여성들인데 그들의 고통이란 말로써는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기를 낳으면 그것이 중국의 씨, 강택민의 종자라고 그 자리에다 얹어놓고 죽였다. 이 얼마나 지독한 인간들인가! 또 산모를 2일 내지 3일만 쉬게하고 즉시 일을 내보내는 것이었다. 일을 할 때는, 특히 시집을 갔던 여성들은 더욱 심한 노동을 시켰다. 나는 집결소에 10일동안 있다가 장흥이라는 도 안전부 발전소 건설에 끌려갔다. 한 가지, 집결소의 식량은 통강냉이와 완두콩을 섞어서 삶은 것, 120g 정도였다. 장흥으로 간 우리들은 점심을 그날은 휴식하였다. 다음날부터 정식으로 일을 하는데, 그 노동이 얼마나 고달프고, 힘든지 일하던 중 쓰러지는 사람들이 정말로 많았다. 새벽 5시에 기상하여 식전작업 1시간 하고, 세수하고 밥을 먹는데 밥은 강냉이밥 또는 꿀을 섞어서 만든 꿀밥 20g 정도로 먹고 보통 11시간의 노동을 했다. 나는 세 달 동안은 그런대로 일하다가, 힘이 다 빠지고 배가 고파 뱀, 쥐, 개구리 등 갖은 동물들로 허기진 배를 채우곤 하였다. 그런데 제일 애로되는 것은 성냥이나 라이타가 없어서 그런 짐승들을 잡아도 모두 생식을 해야만 한다는 점이었다. 그것도 먹다가 안전원들한테 들키면 매를 맞았다. 그래서 길을 걸으면서, 작업을 하면서 가만히 먹어야 했다.



가장 슬픈 일



내가 발전소로 갔을 때, 나의 삼촌분되는 강일봉이란 분이 있었는데, 나를 제일 사랑해주고 먹을 것이 있으면 나를 먼저 찾고, 내가 힘들어 할때는 나의 일도 도와주곤 하던 분이었다. 그 삼촌이 그만 장티푸스라는 열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장티푸스는 이로 옮겨지는 열병인데 나도 그병에 걸렸다. 20명이 그 병에 걸렸는데 16명이 죽었다. 살아난 4명중에서 하늘의 뜻으로, 나도 생명을 잃지않고 이렇게 살아서 이 글을 남기게 되었다.

일봉 삼촌은 눈을 감을 때 나의 손목을 꼭 잡고 라진에 있는 가족들에게 이 소식을 알리지 말고 내가 살아서 도와주라고 눈물을 흘리며 세상을 떠났다. 또 한가지 슬픈 일은 추수날이 왔을 때, 집안의 가장으로서 부모님의 산소에 가지 못한다는 사실이 정말 슬펐다. 도 집결소에서 10월 27일 나는 온성 단련대로 이간되어갔다. 29일 온성 나의 고향 단련대에 이간되어 왔을 때에는 이미 나의 몸은 허약하여 영양실조 2단에 걸린 상태였다. 온성 단련대 역시 고통스러운 단련방법, 잠을 재우지 않고 온밤을 벌세우는 등의 여러 가지 끔찍한 고문을 하였다. 한번은 단련대 마당에 있는 강냉이 한이삭을 훔쳐먹고 하루동안을 굶고, 이틀동안은 잠을 자지 못하고 벌을 섰다. 내가 집으로 오게 되었을 때는 이미 나의 몸은 한걸음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허약 3도에 걸렸다. 달구지에 실려 집으로 왔으나 동생들은 다 중국으로 가고 집은 텅 비어있었다. 할 수 없이 동무들을 찾아서 하루 이틀을 밥을 빌어 먹었다. 나의 고향인 풍인은 내가 살 때보다 한심했다. 어디가나 빈집이 가득하고 사람들은 다 죽고 고향을 떠나 나의 동무들도 얼마남지 않았다. 풍인땅의 절반 인구가 줄어들었다.



또다시 두만강을 건너



나는 그 땅에서 도저히 생명을 연장할 길이 없을 것 같아 12월 29일 다시 중국으로 두만강의 얼음을 기어서 건너왔다. 도문에서 상점집에 7일간 있으면서 영양보충을 하고서야 제대로 걸을 수가 있었다. 그리하여 연길시 연짐에 있는 집사님 가정에서 있으면서 나의 몸은 완전히 회복되었다. 사모님이 진실한 사랑, 밤중에도 일어나 따뜻한 밥과 반찬을 차려주고 나의 영을 위하여 하나님께 하루에도 몇 번씩 기도도 드리고 한 덕분에 나의 몸은 예상보다 빨리 회복되었다. 그리하여 2월 23일 나는 막내동생을 데리러 다시 조국으로 가려고 계산툰에 가서 두만강을 건넜다. 그런데, 넘어가서 몇발짝을 걸어가서 그만 경비대원들한테 붙잡혔다. 가지고 간 돈 200원을 모두 빼앗기고 끌려가던 중 그들이 나의 돈을 나누어가지려고 옥신각신 하는 틈을 타서 도망쳐 두만강에 들어섰다. 총 두방이 어깨너머로 지나가고, 무사히 중국으로 건너오게 되었다.



가난한 노동자의 가정에서 태어나 26년동안 살면서 내가 체험한 현실을 그래도 글로 옮긴 것이다. 보통 중학생 출신의 한 청년의 사생활을 그대로 쓴 글이니 진실과 또 애라는 마음을 담아 내 민족에게 구원의 손길을 펼쳐주기를 바랄 뿐이다.



자료제공 : 기독교북한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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