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세계관으로 살아가기-신앙교육] 대치동 로드맵 vs 킹스키즈(KING’S KIDS) 로드맵 기독교 세계관으로 살아가기-신앙교육 대치동 로드맵 vs 킹스키즈(KING’S KIDS) 로드맵 입시를 치러본 학부모들이 다 아는 유명한 말이 있다. “입시에 성공하려면 수학을 잘해야 하고, 취업에 성공하려면 영어를 잘해야 한다.” 흔히 말하는 대치동 로드맵은 수학 선행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치동 학원가는 여름, 겨울 방학이 되면 ‘초등 의대반 모집 설명회’로 분주한 시즌이 된다. 작년 겨울, 공동체에서 ‘크리스천 부모교육’을 준비하며 해당 학원에 직접 전화를 걸어 ‘초등 의대반’에 대한 문의를 했었다. 그때만 해도 입학 대상이 초등 4학년부터라고 들었는데, 올해는 초등 1학년부터 시작하는 곳도 있다고 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고등수능 수학을 어린이들이 풀도록 훈련하는 것이다. 2024년 대한민국 의대 정원 2천 명 증원 소식이 대한민국 교육계를 흔들고 있다. 발 빠르게 움직이는 학부모들은 중학생 자녀 입시를 위해 지방으로 이사를 결정했고, 지방의 특정 지역 전셋값이 상승했다는 뉴스도 들린다. 6.25 전쟁 중에도 가르치고 배우는 일을 멈추지 않았던 대한민국의 교육 열정은 가히 세계적이다. 그 열정이 나라를 다시 일으키는 기틀이 되었지만, 오늘날 보이는 교육열은 그때의 열정과 다르고, 위험 수위를 넘나들고 있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들이 특정 지역 비신자 가정에만 벌어지는 일일까? 실제 순예배에서 예비 초1 자녀를 둔 자매에게 초등학교 입학 전 영어학원 레벨테스트가 ‘7세 고시’라 불린다는 이야기를 듣고 충격에 빠졌던 일화가 있었다. 반면 부모들이 자녀들의 신앙교육에 대해서는 너그러워 보인다. 주변을 보면 어린 자녀들을 둔 크리스천 부모들이 신앙에 대해 꽤 안도하는 듯하다. 주일학교에서 찬양과 율동을 집에서도 하고, 식사할 때 두 손 모으고 기도하고, 예배 출석을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며 ‘이 정도면 되겠지’라고 생각할 수 있다. 자녀의 신앙을 교회가 위탁 관리해주는 것으로 오해하는 부모들도 생각보다 많다. 그래서일까? 학업과 신앙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을 수 있다는 자신감마저 보인다. 만약 자녀의 생애 발달과정과 특징, 신앙 발달단계에 관한 관심과 고민 없이 부모가 만든 대치동 로드맵으로 전력 질주하게 만든다면 자녀가 무엇을 먼저 내려놓을까? 이 문제에 직면해야 한다. 크리스천 부모인 우리는 자녀들이 살아가는 현재 영적 환경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와 자녀들은 외적으로 풍요로운 시대를 사는 듯 보이지만, 내적으로 매우 궁핍한 시대를 살고 있다. 우리 자녀들이 바라보는 세상은 온통 자기를 높이려는 우상과 나르시시즘의 집착으로 병들어가고 있다. 전통적인 성경적 세계관을 해체하는 포스트모던의 다원주의 한복판에 서 있다. 불행하게도 우리 자녀들은 치열한 대학 입시 경쟁 속에서 유물론, 젠더이데올로기, 네오마르크시즘 등 반기독교적 사상이 담긴 교육을 12년 이상 받고 있다. 크리스천 부모들은 자녀들이 살아가는 세상의 시세를 미리 파악하고, 자녀들을 영적으로 방어하는 진지를 구축해야 한다. 크리스천 부모가 어떻게 하면 자녀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키울 수 있을까? 웨스트민스터 대교리 문답 제1문은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문: “사람이 첫째 되고 가장 고귀한 목적은 무엇입니까?” 답: “사람이 첫째 되고 가장 고귀한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온전히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의 신앙교육은 엄격하기로 유명했다. 그들의 두터운 신앙관과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에 대한 철저한 검증은 훗날 로마 시대의 가혹한 핍박에도 버티고 견디는 힘이 되었다. 오늘날 크리스천 부모교육의 킹스키즈(KING'S KIDS) 로드맵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첫째, 부모는 하나님의 청지기다. 자녀는 우리의 소유물이 아니며, 우리는 하나님의 대행자로 자녀들을 하나님의 일꾼으로 키워야 한다. 둘째, 자녀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음을 믿고,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아갈 때 가장 행복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자녀가 부모의 영향력 아래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려는 교육열을 가져야 한다. 교육의 우선순위 깃발을 자녀의 신앙에 꽂아야 한다. 셋째, 자녀들이 죄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훈계를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자녀를 감싸고 돌며 죄성을 더욱 키우거나 죄에 대한 무감각을 길들이지 않도록 양육해야 한다. 넷째, 자녀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에서 영적 불침번을 서고, 기도의 파수꾼이 되는 부모가 되어야 한다. 특히 학교 교육과정을 자세히 살펴봐야 한다. 2022 교육과정에서는 교육목표를 ‘감수성’에 두고 있다. 성인지 감수성, 인권 감수성, 통일 감수성, 평화 감수성, 생태 감수성, 생명 감수성이다. 인간의 감성 또는 감정의 상태를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아 판단하도록 교육하겠다는 교육목표는 성경적인 도덕적 기준과 판단을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또한 자녀의 신앙교육을 나중으로 미루지 말아야 한다. 건강한 가정에서 건강한 신앙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건강한 가정은 부부가 중심이다. 가정의 중심에 자녀가 있으면 그 가정은 건강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이 자녀의 마음에 거하면, 그 자녀는 결코 인생을 함부로 살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값진 인생을 사는 왕의 자녀로서 킹스로드에서 활약하며 하나님께 쓰임 받는 인물이 될 것을 믿는다. / 송현진 성도(온누리세계관학교, 강남D공동체)
2024-04-27 제1489호
[특별기고] 노동의 의미 특별기고 노동의 의미 우리는 살기 위해 일할까? 아니면 일하기 위해 살까? 대부분 “생활비를 벌고 자신과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일한다”고 말할 것이다. “주말에는 휴가를 보내고, 취미를 즐기고, 친구나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등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려고 일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필자에게는 척 콜슨이 “잠깐만요, 일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척 콜슨에게 일은 숨 쉬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삶의 일부였다. 해병대에서 법률사무소로, 국회의사당에서 닉슨 백악관으로, 특히 교도소 사역과 기독교 세계관 교육에 이르기까지 척 콜슨은 하나님과 대의를 위해 지칠 줄 모르는 열정적인 일꾼이었다. 척 콜슨은 센터 직원들 대부분보다 나이가 몇십 년이나 많다. 하지만 직원들이 그의 열정을 따라잡을 수 없을 때가 많았다. 주말이 지나고 사무실에 출근하면 “월요일이라 하나님께 감사합니다!”라고 말하곤 했던 사람이었다. 동년배 친구들이 은퇴한 지 한참 후에도 죽는 날까지 일하겠다고 다짐했던 그는 정확히 그렇게 했다. 다가오는 근로자의 날을 맞아 척 콜슨이 생각하는 일의 의미에 대해 들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다음은 ‘노동 계층의 영웅’이라는 브레이크포인트 논평에서 척 콜슨이 했던 이야기다. “나는 노동 계층의 영웅들을 기념하는 오늘 행사에 참여하게 되어 특히 기쁩니다. 기독교인들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일하신 하나님과 그분의 형상대로 인간을 일하는 존재로 창조하신 하나님을 경배하기 때문에 근로자의 근본적인 존엄성을 기리는 근로자의 날을 기념해야 할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를 만드실 때 땅을 경작하고 돌보는 일을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고대 세계에서 그리스인과 로마인들은 육체노동을 저주받은 하층민과 노예나 하는 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기독교가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일을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담긴 큰 꿈을 펼치고, 하나님의 동역자로서의 숭고한 소명으로 여겼습니다. 일을 이렇게 높이 평가하는 관점은 교회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중세 시대 길드운동이 교회에서 성장했습니다. 길드운동은 뛰어난 장인 기술에 대한 높은 기준을 세우고, 장인들이 노동한 결과에 만족할 수 있도록 장려했습니다. 길드운동은 현대 노동 운동의 선구자가 되었습니다. 종교개혁 당시 마틴 루터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설교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든 바닥을 닦든 정직하게 하는 일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신념에서 개신교의 직업윤리가 성장했습니다. 윌리엄 블레이크가 공장을 ‘악마의 검은 맷돌’이라고 표현했던 산업혁명 초기에도 기독교인들은 노동자들을 위해 활동했습니다. 당시 공장과 탄광에서 일하는 것은 힘들고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아이들은 노예나 다름없었고, 때로는 기계에 묶여 일하기도 했습니다. 그때 존 웨슬리가 영국 전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가르쳤습니다. 그는 상류층이 아닌 노동자 계급, 즉 석탄 가루에 얼굴이 검게 그을리고, 넝마를 입은 사람들을 찾아갔습니다. 존 웨슬리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그 과정에서 전 국민의 양심이 찔렸습니다. 웨슬리로부터 영감을 받은 그의 제자 윌리엄 윌버포스와 샤프츠베리경이 작업장 내 학대를 근절하는 법안을 제정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들의 노력으로 영국의회는 아동 노동법, 안전법, 최저임금법을 통과시켰습니다. 노동 운동과 기독교의 연관성이 사라진 나라도 있지만, 많은 나라에 여전히 그 전통이 남아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이번 근로자의 날에는 모든 노동이 하나님을 반영하는 것으로 진정한 존엄성을 지니고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말과 행동으로 무엇을 하든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척 콜슨의 이야기 같이 일은 하나님의 선물이기에 다가오는 근로자의 날과 당신이 하는 일을 모두 기뻐하기를 바란다. 정직하고, 솜씨가 빼어난 일은 우리의 삶을 존엄하게 만들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며, 우리의 창조주를 반영하는 것이다. / 에릭 메탁사스(작가, 언론인) 원문: breakpoint(20180903)
2024-04-27 제1489호
[목사님, 질문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건강하게 관계 맺는 방법 목사님, 질문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건강하게 관계 맺는 방법 “자꾸만 사람을 잃는 것 같은 생각이 들고, 인간관계가 너무 어렵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건강하게 관계 맺는 방법이 있습니까?” 1인 가구, 소셜네트워크 발달이 가속화되면서 사회가 점점 개인화되고, 고립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혼밥’, ‘나혼자산다’ 등 미디어와 문화가 오히려 이를 더욱 부추기고 있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하고, 누군가와 관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으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한다. 누구도 관계에 균열을 내거나 관계가 무너지는 데 기여하고 싶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우리는 아름다운 관계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쉽지 않을 때가 있다. 관계 맺는 어려움과 갈등을 해결하는 게 평생의 숙제처럼 느껴진다. 하나님 안에서 건강한 관계 맺는 몇 가지 방법을 제안한다. 첫째, 사람에 대한 기대를 하나님을 향한 기대로 옮기는 지혜와 용기가 필요하다. 인간관계에 대한 실망과 두려움의 뿌리에 ‘기대’가 존재한다. 사람에 대한 기대가 커질수록 그 기대에 대한 반작용도 커질 수밖에 없다. 사람은 기대를 충족시키는데 뚜렷한 한계와 연약함을 가진 존재다. 인간관계에서 내가 기대하는 바를 누군가를 통해 채울 수 없음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그 기대의 시선을 하나님께로 향하여 하나님을 향한 기대로 변화시키는 용기가 필요하다. 우리 안에 있는 결핍이 낳은 게 기대라면, 결국 그 결핍은 하나님으로 채워짐을 경험해야 한다. 인간관계에서 채움을 경험하는 것조차 하나님이 일하시는 거라는 사실을 잊지 않을 때 비로소 그 관계가 온전해질 수 있다. 둘째, 하나님과 건강한 관계가 온전한 인간관계의 처음과 끝임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과 친밀한 사귐과 교제는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이 누군가를 향해 흘러가게 되어 있고, 영향을 주게 되어 있다. 일상에서 하나님과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은 사람과도 건강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 건강한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사람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하나님과의 관계 또한 건강한 경우가 대단히 많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분리할 수 없고, 이것이 성경의 핵심 메시지라고 말한 까닭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스스로 하나님과 괜찮은 관계를 유지하는데 인간관계가 어렵다고 느껴진다면, 잠시 멈추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성경적으로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셋째, 인간관계가 우상이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사람마다 성향이 다르고, 인간관계에 두는 비중이 다르지만, 우리는 인간관계를 떠나 존재할 수 없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람을 허락하신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인간관계마저 일하시는 통로로 사용하신다. 다만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고, 사람은 눈에 보이는 존재이기에 우리의 연약한 시선이 흔들릴 때가 있다. 그래서 영적인 주객이 전도될 때가 있고, 심지어 하나님을 대신해서 인간관계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는 인간관계는 없다. 하나님께 인생의 주도권을 온전히 맡긴 인생은 인간관계에서도 아름다움이 흘러가게 되어 있다. 덴마크의 철학자 쇠렌 키에르케고르는 신앙을 “신 앞에 선 단독자”라고 말했다. 하나님과의 고독한 영적 씨름을 견딜 줄 아는 사람은 비본질적인 것에 중심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다.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과 교제의 기쁨을 아는 사람은 인간관계에서 오는 갈등과 고민을 넘어설 수 있는 힘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름다운 관계와 만남을 통해 기쁨과 충만을 경험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친밀하고, 깊은 사귐과 교제를 경험할 때 아름다운 열매처럼 뒤따르는 것이다. / 정한효 목사(W청년부)
2024-04-27 제1489호
[맛있는 말씀 해설]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눅 1:2~3) 맛있는 말씀 해설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눅 1:2~3) <누가복음> 1장 2~3절에는 누가에게 복음을 전달해 준 사람들이 누구인지, 누가가 <복음서>를 어떠한 태도로 기술했는지가 나온다. 2절에 보면 누가는 두 부류 사람이 전해준 내용을 토대로 <복음서>를 저술한다고 언급한다. 첫 번째 그룹은 처음부터 목격한 자들이다. ‘처음부터’는 세례 요한 때부터, 즉 예수님의 사역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도 전에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길을 예비한 시기를 의미한다. ‘중간부터’ 들었다면 아무래도 앞의 이야기를 잘 모르기에 완전히 이해하는 데 부족함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처음부터 들었기 때문에 복음에 대한 확실한 이해를 바탕으로 전달된 증언이라 할 수 있다. 누가는 이를 반영해서 <복음서>를 저술했다. ‘목격’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복음은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다. 실제 경험한 생생한 현장 목소리가 고스란히 전달된다. 현장에서 육성으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듣고, 활동하신 사역을 보면서 사람들이 얼마나 크게 감동했을까? 받은 감동 그대로를 사람들에게 얼마나 잘 전하고 싶었을까? <복음서>를 읽는 독자들 역시 예수님이 실제로 하신 말씀과 사역에 관해서 생생하게 듣고 싶었을 텐데 누가는 이러한 사람들의 바람을 충족시킬 만한 자료를 모아서 <복음서>를 썼다. 두 번째 그룹은 말씀으로 된 일꾼들이다. ‘일꾼’이라는 단어는 열두 제자를 지칭하는 용어였지만, 그 의미가 확장되어서 열두 제자처럼 헌신한 자들에게도 사용하게 된다. 이 일꾼의 특징은 말씀 충만이다. 말씀으로 변화된 자가 복음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다. 이처럼 누가는 신뢰할 만한 믿음의 사람들이 전해준 소식으로 <복음서>를 집필했다. 3절을 보면 누가가 <복음서>를 집필하는 태도가 세 가지로 드러난다. 먼저, 누가는 ‘모든 일’을 살핀다. ‘대부분’이 아니라 ‘모두’라고 말하는 누가의 자신만만한 모습이 나타난다. 모두를 파악해야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다. 일부분만 살피면 어느 한쪽으로 편향되어서 반대 주장이 나왔을 때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다. 누가는 그러한 약점 없이 균형 있게 <복음서>를 집필하는 데 힘썼다. 그다음으로, 누가는 ‘근원부터’ 살핀다. 어느 한 부분에 관해 글을 쓰려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질문에 계속 답을 하면서 근원적 질문에 도달하게 된다. 단적인 예가 <누가복음> 3장의 족보에 나타난다. 누가는 인류의 아버지의 아버지, 그 아버지의 아버지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결국 하나님께 도달하게 된다는 점을 밝힌다. 실제로 학문을 탐구하다 보면 결국 신적 차원의 근원적 질문을 던지게 되어 있다. 예를 들어, 우주를 연구하다 보면 조물주의 창조가 아니고서는 설명하기 어려운 측면이 발견되어 결국 신의 창조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끝으로, 누가는 ‘자세히’ 살핀다. 정확하고, 엄정하게 연구해서 <복음서>를 기술했다. 이 정도만 하면 되었다고 만족하지 않고, 매우 확실하게 복음을 증거한다. 누가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치밀한 태도로 일관했으며, 신뢰할 만한 사람들이 제공한 내용을 잘 반영했다. 누가의 이러한 모습이 우리에게 귀감이 된다. 우리는 복음의 소식을 귀담아들으려고 노력해야 하고, 들은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전하기 위해서, 그 복음이 내 안에서 선명해지기 위해서 부단히 힘써야 한다. / 이강현 목사(양재A공동체)
2024-04-27 제1489호
[주일 강단] 성령님을 따르는가, 다루려는가 성령님을 따르는가, 다루려는가 사도행전 8:4~25 / 이재훈 위임목사 바람이 불길을 더 크게 만드는 법입니다. 교회에 대한 핍박의 바람은 교회를 무너뜨리기보다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더욱 강화시켰습니다. 성령님이 일으키시는 대반전의 역사입니다. 스데반의 죽음으로 시작된 교회에 대한 핍박이 더욱 심하게 일어났습니다. 그 결과 예루살렘 성도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씨앗이 흩뿌리게 되듯핍박의 바람으로 인해서 예루살렘 성도들이 곳곳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흩어진 그들이 외로움과 절망 속에 있는 게 아니라 흩어진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너희는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증인이 되리라”하셨고, 성령이 임하신 결과 복음이 온 세상에 전해질 거라고 하셨지만, 당시 예루살렘의 성도들은 그 말씀이 얼마나 중요하고, 어떻게 따라야 하는지, 어떤 의미에서 순종하지 못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공동체가 너무 아름답고, 은혜로웠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의 핍박으로 인하여 시작된 핍박의 물결으로 인해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이 원하지 않는 곳으로 흩어지게 되었는데, 그제야 비로소 하나님의 계획을 깨닫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핍박은 교회를 위축시키기보다 본래의 사명으로 돌아가게 만들었고, 복음이 예루살렘을 넘어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증거되도록 했습니다. 성령님이 이루시는 대반전의 역사입니다. 세계 역사에서도 이와 같은 일들을 많이 살펴볼 수 있습니다. 1949년 중국에서 공산당이 선교사들을 모두 추방했습니다.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가 세운 중국내지선교회 소속 637명의 선교사들이 중국에서 추방되었습니다. 큰 핍박이 일어났는데 지금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기독교인이 존재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공산주의 국가이고, 가장 교회를 제한하고 핍박 하는 국가인데,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이 가장 많은 국가가 중국입니다. 아이러니한 상태 아닙니까? 중국은 신앙의 자유가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신앙의 자유가 있고, 종교의 자유가 있는 나라들은 오히려 교회가 침체하고, 극심한 통제가 있는 국가에서는 그리스도인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당시 중국에서 추방당한 선교사 중에서 286명이 다른 아시아 국가에 재배치되어서 아시아 복음화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여러분, 중국에서 모든 선교사들이 추방되면 중국 교회는 끝난 것입니까? 아닙니다. 1949년 중국내지선교사들이 모두 추방될 때 제2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저는 틀림없이 중국에 엄청난 영적인 혁명이 일어나고 있다고 믿고, 그 증거들이 있습니다. 조직화된 건물을 가진 교회들이 핍박 속에서 사라지는 것 같지만, 함께 영향력을 발휘하는 성도들은 증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대반전의 역사입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핍박의 시작은 형벌이 아닙니다. 복음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땅 끝까지 이르러 전해지게 하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변화산에서 나타난 그 사건을 보고 그곳에 초막 세 개를 짓고 머무르기를 원했던 것처럼,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은 계속 예루살렘에 머물기 원했습니다. 하지만 성령님이 강력하게 핍박이라는 통로를 사용하셔서 그들을 복음의 증인으로 만드셨습니다. 성령의 바람에 순종하지 않으면 성령의 회오리바람이 불어서 원하지 않는 곳으로 갈 수도 있습니다. 한민족이 전 세계에 750만 명 이상 흩어져 있는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그들이 디아스포라가 된 이유는 각기 다를 것입니다. 사업을 위해, 교육을 위해, 우리나라에 어떤 상처가 있어서 흩어져 있겠지만, 세계 복음화에 한민족 디아스포라가 기여하는 것을 볼 때, 한민족의 흩어짐 또한 <사도행전> 역사의 한 부분이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처한 심각한 문제와 풀리지 않는 고난은 복음이 증거되기 위해 하나님이 예비하신 일의 전반부라는 것을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성령님을 따르면 언제나 대반전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절망에서 소망이 이끌어지고, 좌절에서 축복을 만들어 내시는 성령님의 역사를 바라봐야 합니다. 성령의 역사는 사마리아를 뚫고 들어갔다! “빌립은 사마리아에 있는 한 도시에 내려가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빌립의 말을 듣고 그가 일으키는 표적들을 본 사람들은 모두 그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찢어질 듯한 소리를 지르며 떠나갔고 많은 중풍 환자들과 지체 장애인들이 나았습니다. 그리하여 사마리아 도시 안에 큰 기쁨이 생겼습니다”(5~8절). <사도행전>의 저자는 누가입니다. 그의 직업은 의사입니다. 의사의 시각에서 이것을 귀신의 역사라고 섬세하게 분별했습니다. 과학적 지식을 기초로 병을 고치는 그가 바라볼 때 이것은 영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육체의 질병이 기적적으로 낫는 하나님의 능력과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는 표적들을 그가 본 것입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났을까요? 빌립의 위대함을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빌립이 전하는 말씀에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성령 표적의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복음의 말씀을 사람들이 귀를 기울여 듣고, 믿게 하려고 표적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에 표적과 함께 복음이 전해지고, 그 도시에 믿는 이들이 나타났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수백 년 동안 사마리아는 유대인들의 출입금지구역이었기 때문입니다. 주전 722년 앗시리아에 의해 사마리아가 점령을 당합니다. 앗시리아가 했던 정책은 바벨론보다 훨씬 잔인하고, 교활했습니다. 잔인하게 지배했을 뿐만 아니라 교활하게 그 너머를 바라보았습니다. 바벨론은 피지배 민족을 보호하고 어느 정도 존중했습니다. 반면 앗시리아는 혈통을 섞었습니다. 이른바 사민정책입니다. 앗시리아의 주민들을 사마리아로 데려와 강제 이주시키고, 사마리아 사람들을 앗시리아로 데려가 섞어버렸습니다. 강력한 이주 정책과 사마리아와 앗시리아의 혼혈정책을 써서 정체성을 말살시키는 것입니다. 정통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순수 혈통주의에 빠져 있던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상종조차 하면 안 됐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는 항상 돌아가는 지역이었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역사는 사마리아를 뚫고 들어갑니다. 빌립이 사마리아에 갔을 때, 그곳은 들어가서는 안 되는 지역이었습니다. 그러나 복음 앞에서는 어떤 장벽도 없습니다. 문화적 장벽, 역사적 장벽, 사람들의 심리적 장벽도 뚫고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믿는 이들이 증가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에 들어갔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유대인으로서 사마리아에 들어갑니다. 빌립은 헬라파 유대인이기 때문에 가능했을지 모르지만, 베드로와 요한,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사마리아로 가서 사역을 했습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성령의 세례가 그들 가운데 임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세례’ 체험 “예루살렘에 있던 사도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그들에게 보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곳에 도착해서 사마리아 사람들이 성령받기를 기도했습니다. 이는 그들에게 아직 성령이 내리시지 않았고 그들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을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에게 손을 얹자 그들이 성령을 받았습니다”(14~17절). 사마리아 사람들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로 변화되는지를 상세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빌립의 전도로 인해 그들이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당시의 세례는 오늘날 물세례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그들에게 성령이 내리지 않았다는 것은 오순절 예루살렘에 임했던 성령의 세례와 같은 역사를 아직 체험하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으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물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들은 성령의 세례를 받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이 상태의 간격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에게 와서 안수했더니 그들 또한 성령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여기에 많은 논쟁이 있습니다. 교파마다 해석도 다릅니다. 빌립의 전도를 받고 예수님을 믿게 된 것도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 어떤 교파에서는 그때 믿게 된 것 자체가 성령의 세례이므로 ‘성령의 세례’라는 말 자체를 거부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여기 성령이 아직 내리지 않았고,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의 기도를 통해 성령을 받았다는 말씀은 어떤 의미가 되는 것입니까? 어떻게도 해석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미 성령의 세례를 받은 것이니 성령의 세례를 부인하는 것은 본문에 근거하면 합당하지 않은 것입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 물세례를 받은 이후 기계적으로 성령의 세례를 규범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이 말씀은 성도들이 구원받은 다음에 성령을 받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구원을 얻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신 분이 성령님이신데, 그분을 믿고 받아들였지만, 아직 성령님을 온전히 따르고 사로잡히는 충만함을 경험하는 체험이 없는 이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모셨다고 고백했지만, 아직 온전히 주인 되지 못 하는 상태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임재하심과 성령의 세례는 시기별, 사람마다 다릅니다. 오늘 본문처럼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다음에 성령세례를 받는 이들도 있고, 물세례를 받을 때 동시에 받는 이들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먼저 성령의 세례를 받고 나중에 물세례를 받는 이들도 있습니다. 시점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어느 시점에 있어야 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성령의 체험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체험은 예수님을 입술로만 “내가 믿습니다”는 고백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의 온전한 주인 되심을 확신하는 것이고, 내가 예수 그리스도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한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고, 온전히 성령님을 따르는 삶을 살겠다는 내면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구원의 확신이 분명해 집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예수님을 부인할 수 없고, 순교할 수 있는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나는 구원 받았나?”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글쎄요 제가 좀 더 열심히 해야 될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하는 분들은 100% 성령의 세례가 없는 분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내가 확신한다는 것이 구원의 보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고,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마음으로 받아들인 자는 구원이 임한다고 했으니 구원받는 것입니다. 유월절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할 때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약속하셨습니다. “좌우 인방과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바르면 내가 그 피를 보고 넘어가리라.” 그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모두 연락해서 그 피를 받아서 발랐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그 피를 바르면 보고 넘어가리라”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 양의 피를 바르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다고 하셨으니 감사합니다”라고 믿음으로 잠을 푹 잤을 것입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밤새 잠을 못자고 ‘피의 양이 너무 적어서 못 보시면 어떻게 하지?’ 그래서 도배를 하듯이 바르고도 밤을 샙니다. 여기서 불안해서 잠 못 이룬 그 집을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을까요? 죽음의 사자가 들어갔을까요? 안 들어갔을까요? “너는 못 믿으니깐 들어가야겠다”면서 들어갔을까요? 아닙니다. 의심과 불안과 염려가 있었지만, 약속대로 바르긴 발랐습니다. 그 피를 보고 넘어가리라고 하신 대로 들어가지 않으셨습니다. 지나가고 나서야 안심한 사람이 많았을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확신과 능력 없이, 그리스도의 증인된 삶 없이 믿는 단계에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성령이 충만하게 내리신다는 것은 바로 그 단계에서 확신과 능력 가운데 “나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나는 예수의 사람입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되고 싶습니다. 나는 내 생명에 위협이 올지라도 예수님을 선택하겠습니다”라는 확신을 가지고 성령의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제자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했지만, 오순절 성령이 임하시기 전까지 의심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승천하시는 모습을 보고도 의심했습니다. 그 단계 있는 제자들은 구원 못 받는 사람들입니까? 성령의 세례는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세례가 임하는 그 상황을 사모하고, 따라야 합니다. 그것이 말씀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증거되는 상황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나도 이런 체험이 있다고 자랑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확신이 있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나도 에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나도 스데반처럼 순교할 수 있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 마음을 사모하는 영혼들에게 성령의 역사가 임하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에게 성령의 세례 체험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환경과 상황에 상관없는 기쁨, 죽음이 두렵지 않은 기쁨 성령님을 따를 때 나타나는 중요한 특징이 기쁨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의 삶은 기쁨의 삶입니다. 세상이 주는 기쁨은 모두 가짜 기쁨입니다. 상황과 환경이 바뀌면 사라지는 것은 진정한 기쁨이 아닙니다. 경제 형편이 나아지고, 건강할 때 주어진 기쁨은 지나가는 기쁨입니다. 그러나 이 기쁨은 환경과 상황에 상관없는 기쁨입니다. 환경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죽음 앞에 서면 사라지는 기쁨이 아니라 죽음이 두렵지 않은 기쁨입니다. 이런 일들이 사마리아에서 일어났습니다. 사마리아에서 마술로 명성을 날렸던 시몬이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은 베드로와 요한이 안수함으로 성령님이 임하시는 것을 보고, “내가 돈을 줄테니 그 능력을 나에게도 달라”고 요청합니다. 역사적으로 성령님이 역사할 때 항상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사탄은 두 가지 방법으로 우리를 공격합니다. 스데반에게 했던 것처럼 직접적, 전투적으로 공격하기도 하고, 시몬과 같은 사람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하용조 목사님 표현에 의하면, ‘성령님을 세속화하고 상품화하고 물질화하는 것이다. 그것은 성령님을 자신이 다룰 수 있는 대상인 것처럼 그렇게 속이는 것이다.’ 성령님은 우리가 온전히 따라야 할 분이지, 우리가 다룰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시몬은 자신이 가진 돈으로 성령님을 다루려고 했습니다. 성령님은 물질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다루는 대상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증거되고, 예수님을 온전히 주인으로 모시며 살기 위해 임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다루는 분이 아닙니다.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 “그러나 베드로는 그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선물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 당신은 그 돈과 함께 망할 것이오’”(20절). 하나님의 복음이 증거되기 위해 선물로 주신 성령님의 역사에는 온전한 순종, 순전한 헌신, 그리고 순교만이 어울릴 뿐입니다. 선물로 주시는 성령님의 역사를 가지고 자신의 이익과 다른 목적에 사용하려고 할 때 하나님은 결코 허락하시지 않고, 망하게 하십니다. 한때 성령의 은사를 선물로 받은 사역자들이 마치 성령님을 자기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처럼 사역하다가 망했습니다. 결국 열매도 없었습니다. 역사상 많은 사례가 있었습니다. 한때 성령님을 사모해서 하나님의 은사를 받고, 복음이 증거되는 일에 순수하게 쓰임 받았던 이들이 어느 한 순간 시몬처럼 되어 버린 것입니다. 성령님을 상품화하고, 마치 성령님을 자신이 다루는 것처럼 생각하는 교만에 빠지게 될 때 복음의 문이 막힙니다. 여러분, 성령님의 역사에 많은 일이 동반되어 나타날 수 있지만, 어느 때 변질될까요? 선교와 상관없이 이루어질 때입니다. 복음이 증거되는 일과 상관없어질 때입니다. 빌립이 표적의 의미를 말했습니다. 말씀을 믿게 하려고 표적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복음이 온 세상에 전해지게 하는 일과 상관없는 성령의 은사들은 그것이 치유이든, 어떤 것이든 간에 시몬과 같이 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하나님의 선물로 존중해야 합니다. 그 선물이 주어진 이유는 복음을 증거하는 선교사역을 위해서입니다. 그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성령님의 깊은 체험을 원하십니까? 내가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지를 증명하기 위해 간구하지 마시고, “하나님, 저도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저의 입술을 통해 복음이 증거되고, 저의 삶을 통해 복음이 전해지게 해 주십시오”라고 간구하십시오. 그때 성령님이 임하실 것입니다. 성령님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입니다. 사탄은 우리가 시몬처럼 되기를 원합니다. 성령님의 역사를 물질적인 것과 연관시켜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삶은 성령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역사를 강하게 체험하는 삶이 언제 가능합니까?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려고 할 때 가능하고, 체험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을 자신의 뜻대로 다루려고 하지 마십시오. 사탄을 기쁘게 하는 시몬처럼 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을 따르고 순종하십시오. 복음이 증거되는 일이 헌신하십시오. 그때 성령님이 강하게 여러분을 붙잡아 주시는 은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성령님을 더욱 온전히 따르고 순종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바로잡습니다. 지난 주 신문(4월 21일자) 주일강단 본문에 ‘<시편> 66편을 인용해서’라는 문장은 ‘<이사야> 66장을 인용해서’가 옳기에 바로잡습니다.
2024-04-27 제1489호
[주일 강단] 순교가 선교의 문을 열다 순교가 선교의 문을 열다 사도행전 7:54~8:3 / 이재훈 위임목사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이 질문 앞에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과연 나의 생명과 바꿀 수 있을 만큼 귀중한 것인가?”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은 생명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려고 우리 모두 힘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생명을 내걸고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시대와 상황에 있었던 성도들 가운데 기쁘게 예수님을 믿는 삶을 선택했던 분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자신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않아서 그런 선택을 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얻는 영원한 생명이 자연적 생명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소중한 것을 확신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이 시대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그 어떤 고난과 핍박이 주어지지 않는 사회에 살고 있기에 순교의 도전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순수하지 못하고, 때로 허영과 위선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신앙을 신앙답게, 교회를 교회답게 인도해 주고, 온 세상을 향한 선교의 문을 열어 준 것은 순교였습니다. <사도행전>의 첫 번째 순교자가 스데반입니다. 스데반의 순교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핍박의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신호탄과 같았고, 동시에 교회가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문이 열렸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담대하게 진리를 증거하는 모습 오늘 본문에 나타난 스데반의 모습은 그가 위대한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닮은 모습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순교란 위대한 어떤 사람들이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닮은 사람들이 어떤 상황 에서 믿음의 선택을 했기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순교란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스데반에게서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첫째,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진리를 증거하는 장면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언제나 진실 앞에 담대합니다. 진리를 전하는 데 어떤 희생이 요구되더라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성령님이 진리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이 산헤드린 공회에 고소당한 이유는 예수님이 고소당한 이유와 동일합니다. 성전과 율법을 모독했다는 ‘신성모독죄’입니다. 예수님의 경우는 <요한복음> 2장 19절에서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삼일 만에 다시 일으키리라”고 말씀하셨다는 이유로 성전을 모독했다고 정죄를 받았습니다. 또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등 하나님과 자신을 동등한 존재로 말씀하셨다는 이유로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정죄와 재판을 받으셨습니다. 스데반이 산헤드린 공회에서 심문을 받을 때 아브라함부터 시작해서 구약 역사를 관통하는 설교를 합니다. 아브라함, 모세, 다윗으로 이어지는 핵심적인 줄기가 구약 역사의 맥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모세와 다윗에게 언약을 주시고, 그 언약을 통해 약속하신 분이 예수님이신데, 당신들이 성령을 거역하고 그 예수님을 죽였다고 지적했습니다. 스데반의 설교가 다윗에서 그친 것은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분노하며 중지시켰기 때문입니다. 계속 들었다면 이어졌을 텐데 설교가 중지되었습니다. 스데반은 그들을 향해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 받지 못한 이들”이라고 책망했습니다. 또 그들이 신성시하는 성전과 율법은 장차 오실 예수님을 보여주는 모형이었기에 더는 그것에 매여 있을 필요가 없음을 설교했습니다. <시편> 66편을 인용해서 “하나님은 사람이 만든 집에 거하시는 분이 아니다. 모든 율법을 성취하시며 오신 예수님을 당신들이 못 박아 죽였다”고 진실을 증거했습니다. 그러나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진실을 왜곡했고, 거짓 선동을 일으켜 스데반을 고소했습니다. 스데반은 살기 위해 진실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변호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역사의 주인이시고, 중심이시며, 심판자로 오신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가 꽉 막힌 사람들이여, 당신들도 여러분의 조상처럼 계속해서 성령을 거역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의 조상이 핍박하지 않은 예언자가 있었습니까? 그들은 심지어 의인이 올 것을 예언한 사람들을 죽였고 이제는 당신들도 그 의인을 배반하고 죽였습니다. 당신들은 천사들이 전해 준 율법을 받았으면서도 그것을 지키지 않았습니다”(51~53절). 산헤드린 공회원들의 영적 상태를 담대하게 지적했고, 예수님을 죽인 죄를 드러냈습니다. 진실을 증거하는 일에 담대했던 예수님처럼, 모든 불법 재판과 심문 앞에서 담대하고 진실을 증거하셨던 예수님처럼, 스데반은 진리의 영이신 성령으로 충만해 담대하게 진리를 증거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모습 둘째, 분노하는 이들 앞에서 그들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장면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성령을 거역하는 사람들은 진리를 들었을 때 분노하며 이를 갈았습니다. “그들은 이 말을 듣고 화가 치밀어 올라 스데반을 보며 이를 갈았습니다”(54절). 스데반은 자신을 향해 이를 갈고 분노하는 이들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그를 죽이려는 사람들은 사탄의 영으로 충만했고, 악의 영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성령 충만해서 그들을 보지 않고,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 오른 편에 서 계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영광스러운 광경에 침묵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외쳤습니다. ‘보십시오.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의 오른편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56절). 스데반은 자신의 용기로 이 상황을 이겨낸 것이 아닙니다. 성령 안에서 부활하셔서 하나님 오른 편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스데반이 본 예수님의 모습을 “하나님 오른편에 서 계신 것을 보았다”고 표현합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 오른편에 계신 예수님을 묘사할 때 본문에서는 ‘서 계셨다’고 하고, 또 다른 곳에는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계신다’고 표현했습니다.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초대교회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다고 말할 때는 심판자이심을 의미하고, 서 계신다고 말할 때는 우리를 변호하시고 중보하시는 분임을 의미한다.” 스데반이 본 것은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시는 예수님, 우리를 변호하시고, 중보하시는 일을 하고 계시는 예수님을 바라봤다는 것입니다. 곧 스데반을 위하여 중보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을 바라본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예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앞에 놓여 있는 십자가의 고통을 바라보지 않으시고, 그 너머에 있는 기쁨을 보셨습니다.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봅시다. 그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기쁨을 위해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시고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히 12:2). 예수님이 십자가 너머에 있는 영광과 기쁨, 하나님 뜻이 이루어지는 기쁨을 바라보셨기에 십자가를 감당하셨던 것처럼, 스데반도 자신을 향하여 이를 갈고, 분노하며, 죽이려 하는 그들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 자신을 위해 중보하고 변호하시는 예수님, 그분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았기에 기쁨으로 순교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본다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 계신 예수님을 바라본다면, 우리도 스데반처럼 믿음의 승리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는 모습 셋째, 스데반이 자신을 향해 돌을 던지며 죽이려는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는 장면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들이 돌로 칠 때 스데반은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아 주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스데반은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주여,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소서’라고 외쳤습니다. 이 말을 끝낸 후 그는 잠들었습니다”(59~60절). 스데반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면서 드린 두 개의 기도와 동일하게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여, 내 영혼을 받아 주소서”라고 기도하신 것처럼, 스데반도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아 주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또 하나는 예수님이 자신을 못 박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소서. 저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라고 하신 것처럼, 스데반도 “주여,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와 스데반의 기도는 동일하게 복수의 기도가 아니라 용서의 기도였습니다. 스데반이 어떻게 예수님의 기도를 동일하게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살아계신 성령님이 그리스도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그에게 충만했기에 십자가 죽음 앞에서 예수님의 기도와 자신을 돌로 치는 그들 앞에서 스데반의 기도가 동일하게 터져 나온 것입니다. 용서의 기도가 일으킨 변화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용서의 기도는 어떤 변화를 일으켰습니까? 함께 못 박힌 한 편의 강도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원래 양편에 있는 모든 강도가 예수님을 조롱했다고 했습니다. <마가복음>을 보면 함께 못 박힌 강도들이 모두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한 편 강도가 예수님께 구원을 요청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함께 조롱했던 이에게 어떻게 이런 변화가 일어났을까요?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예수님의 용서의 기도가 있었습니다. 반복해서 “아버지,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소리가 바로 옆에 있던 강도들에게 들렸을 것입니다. ‘이런 죽음을 당하면서도 용서하는 저 사람은 누구인가?’ 그 기도를 들을 때 성령님이 역사하심으로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이 깨달아지고, 믿어졌기에 함께 죽어가는 죄수에게 “당신의 나라가 임할 때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용서의 기도가 함께 십자가 죽음을 경험한 한편의 강도를 구원했다면, 스데반의 기도는 어떤 열매를 낳았을까요? 곧바로 누군가 구원을 받았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하지만 힌트가 있습니다. 앞으로 누군가 변화될 거라는 힌트가 나옵니다. “그를 성 밖으로 끌어낸 후 돌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목격자들은 자기들의 옷을 벗어 사울이라는 청년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58절). 이 사울은 바울입니다. 사울은 히브리식 이름이고, 바울은 헬라식 이름입니다. <사도행전> 전반부에 사울이라는 이름이 더 많이 나오는 것은 부르심을 받기 이전이었기 때문이고, 부르심을 받은 이후에 바울이라는 이름을 더 많이 쓴 것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았기에 헬라식 이름을 사용한 것입니다. 바울이 스데반의 순교 장면에 나타납니다. 그는 구경꾼이 아니라 스데반 죽음의 협력자, 나아가 책임자가 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돌을 든 자들이 바울 앞에 자신의 옷을 벗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이 행위들은 그가 어떤 법적 효력을 발생시키는 책임 있는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누가는 바울에 의해 전도 받고 구원 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기록할 때 틀림없이 바울의 도움을 받았을 것입니다. 바울이 회심한 이후 스데반의 죽음을 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돌에 맞는 장면, 그 순간에 자신이 그 현장에 있었던 것을 누가를 통해 표현하도록 한 것입니다. 당시 사울은 스데반의 죽음을 당연히 여기고 그것을 기쁘게 여기는 상태였지만,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는 그가 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이방인의 사도가 된 그 출발을 스데반의 용서의 기도로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예수님께 부름을 받고, 이방인의 사도로 쓰임 받게 된 것은 스데반의 용서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자신을 죽이는데 앞장서고 참여하는 이들을 용서하는 스데반의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하셨기에 그 무리 책임자로 있었던 사울을 부르시고, 이방인의 사도로 역사하신 은혜를 바울이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를 통해 이 장면을 기억하고, 자신의 이름을 거기에 넣도록 한 것입니다. 스데반의 기도응답으로 하나님이 사울을 부르셔서 사용하셨습니다. 사울의 기도로 누가가 변화되었습니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서 중보기도하시는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 지금도 이 땅에 회심의 역사,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성령 충만한 이들의 중보기도는 끊임없이 누군가를 회심과 구원의 역사로 변화시킵니다. 예수님의 용서의 기도로 강도가 변화된 것처럼, 스데반의 용서의 기도로 바울이 변화된 것처럼, 바울의 기도로 누가가 변화된 것처럼 계속 중보의 기도, 특히 용서의 기도는 복음의 역사가 능력 있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응답이 됩니다. 스데반의 순교, 핍박 신호탄이자 복음 퍼지는 영적 폭탄 스데반의 순교는 초대교회에 주어진 핍박의 신호탄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예루살렘교회에 큰 핍박이 일어나 성도들이 흩어졌습니다. 성도들은 흩어지기를 원하지 않았지만, 핍박 속에서 예수님을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초대교회 공동체에 머무르고, 자발적으로 흩어지지 않았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가둘 수 없습니다. 때로 하나님이 핍박을 통해서 흩어지게 하셨고, 흩어짐은 곧 복음의 확산으로 이어졌습니다. 성도들이 핍박 속에서 흩어져 예수님을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안드레는 아시아 여러 국가를 다니며 예수님을 증거하다가 매달린 십자가의 두 끝이 가로로 땅속에 파묻혀 순교했습니다. 베드로는 네로 황제에 의하여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습니다. “내가 어떻게 예수님처럼 바로 매달릴 수 있는가? 거꾸로 매달아 달라”고 요청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울도 역시 네로 황제에 의해 로마에서 참수를 당했습니다. 야고보, 빌립, 마태, 마가, 누가, 맛디아, 도마 등도 순교했습니다. 요한만 밧모섬에 갇힌 채 광산에서 일하면서 가장 오래 살았습니다. 그 또한 예수님의 어머니를 모시는 여정에 포함되어 더 오래 살았을 뿐입니다. 네로 황제는 로마에서 일어난 대화재의 책임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돌리며 잔인하게 박해했습니다. 그 이후 초대교회 감독이었던 이그나티우스는 A.D. 107년 순교를 당했는데, 그는 순교의 자리로 나아가면서 일곱 개의 편지를 남겼습니다. 유명한 <이그나티우스의 편지들>입니다. 이 편지를 보면 그분은 살고자 애쓰지 않고 도리어 순교하기를 사모했습니다. 자신을 구해달라는 기도의 부탁은 하나도 없습니다. 용기 있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 부탁이었습니다. 그 편지 일부 내용을 읽어보면 이렇습니다. “내가 단지 그리스도인이라 불리 울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 행동할 수 있도록 해주시오. 나는 고난당할 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할 것이며, 언젠가 자유스럽게 그와 함께 다시 부활할 것이오. 나는 그리스도의 순수한 떡으로 바쳐질 수 있도록 짐승들의 이빨에 찢겨져야 할 하나님의 밀알이라오.” 거룩한 확신과 부활에 대한 소망과 담대함만 있을 뿐입니다. 스데반의 순교는 핍박의 신호탄이었지만, 동시에 복음이 온 세상에 퍼지는 영적 폭탄이 되었습니다. 스데반은 우리가 도저히 본받을 수 없는 경지에 오른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와 동일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는 성령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일꾼이었을 뿐입니다. 여러분, 성령님께 온전히 순종할 때 진실 앞에서 담대할 수 있습니다. 상황과 환경이 아닌 예수님만 바라볼 수 있습니다. 자신을 핍박한 원수까지 용서하고, 또 다른 누군가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스데반이 예수님을 닮을 수 있었다면, 우리에게도 스데반처럼 예수님 닮은 모습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동행하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2024-04-20 제1488호
[주일 강단] 갈등의 물결, 부흥의 파도가 되다 갈등의 물결, 부흥의 파도가 되다 사도행전 6:1~15 / 이재훈 위임목사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교회는 아무 문제가 없는 공동체가 아니었습니다. 두세 사람이 모인 곳에는 갈등이 언제나 존재합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교회에는 교회 밖으로는 핍박이 있었고, 안으로는 갈등이 있었습니다. 공동체 안에 서로에 대한 불평이 일어나 갈등이 생겼습니다. 예루살렘교회에 믿는 이들이 늘어나고, 다양한 사람들이 모임으로 인해서 생기는 두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첫째, 성도들의 숫자가 많아짐으로 인해 생길 수 있는 행정적인 문제입니다. 6장 1절에서 “음식을 분배 받는 일에서 누락 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의도하지 않은 실수라는 뉘앙스를 보여줍니다. 어떤 이유로든 있어야 할 이름이 빠지고, 마땅히 돌봄을 받아야 될 대상이 누락이 되는 것은 단순한 행정적인 문제일 수 있지만, 관계 문제, 영적인 문제로 확대되기도 합니다. 둘째, 서로 다른 문화 속에 살았던 사람들이 한 공동체를 이룸으로써 생기는 문화적 긴장입니다. 구제 명단에 빠진 사람들은 주로 그리스파 유대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파 유대인들이 히브리파 유대 사람들에게 불평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파’, ‘히브리파’라는 단어를 쓴 것은 교회 안에 정당처럼 파가 나눠졌다는 게 아닙니다. 언어와 문화에 더 익숙한 사람들이 함께 공동체를 이루었다는 것인데, 문제는 주로 누락이 된 사람들이 그리스파 유대인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문화적 긴장 혹은 갈등으로 비화된 것입니다. 우선순위 재정립, 성령과 지혜 충만한 리더십 세우기 사도들은 이 갈등을 그냥 덮으려 하지 않고 해결했습니다. 이 갈등이 도리어 부흥의 촉매제가 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첫째, 우선순위를 재정립했습니다. “그리하여 열두 사도들은 제자들을 모두 불러 놓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음식을 분배하는 일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 가르치는 사역을 소홀히 여기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형제들이여, 여러분 가운데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다고 알려진 사람 일곱 명을 뽑으십시오. 그러면 이 임무는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고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온 힘을 기울이겠습니다”(2~4절). 갈등 속에서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각자가 올바른 우선순위에 충실하고 있는지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하나님 말씀에 나타난 우선순위에 충실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또한 각자에게 주어진 우선순위에 충실하고 있는지를 재정립해야 합니다. 사도들이 구제와 봉사가 중요하지 않다고 여긴 것이 아닙니다. 사도들이 힘든 일을 하지 않겠다고 한 것도 아닙니다. 이 일로 인하여 공동체의 영적 생명력이 약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우선순위를 더욱 명확하게 한 것입니다. 갈등이 생길 때 그것을 해결하려다가 우선순위를 잃어버리는 일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기도와 말씀이라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가장 중요한 것을 우선순위로 삼았습니다. 공동체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를 분명히 알려주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들을 리더십으로 세웠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 제안을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빌립, 브로고로, 니가노르, 디몬, 바메나, 유대교로 개종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뽑았습니다. 그들은 이 사람들을 사도들 앞에 세웠고 사도들은 그 사람들 머리 위에 손을 얹고 기도했습니다”(5~6절). 사도들은 명령하지 않았습니다. ‘제안했다’는 말이 나옵니다. 사도들의 권위는 수직적이고, 강압적인 권위가 아니었습니다. 함께 제안하고 대화하는 수평적 권위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이 제안을 기쁘게 받아들여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다고 알려진 일곱 사람을 뽑았습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였다’는 것은 사도직과 집사직으로 구분해서 완벽하게 직제화되었다고 보기는 어렵고, 사도들을 돕는 보조사역자로서 일을 분담했다고 봐야 합니다. 또 이들 가운데 스데반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들 중에서도 뚜렷하게 지혜와 능력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지혜’란 현실에 대한 분별력과 판단력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이성과 판단력을 통해서 결정하게 하신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이성적 판단력을 제외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성적 판단을 사용해서 성령 안에서 결정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이성적 판단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신비에 맡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 기적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성령 안에서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지혜로 결정해야 할 때가 있고, 때로는 믿음으로 결정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이 두 가지가 맞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이성적 판단을 가지고 결정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믿음으로 결정한다’고 할 때 이성적 판단을 마비시킨다는 뜻이 아닙니다. 또 ‘믿음으로 결정한다’고 할 때도 이성을 배제해서는 안 됩니다. 지혜롭게 할 때도 믿음을 배제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판단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영역, 하나님의 신비, 하나님의 섭리를 받아봐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응답을 받을 때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예”, “아니오”, “기다려라”입니다. 이 외에 두 가지가 더 있을 수 있습니다. “내가 너를 믿을테니까 네가 잘 판단해서 결정해 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판단을 존중해 주시는 응답이 있을 수 있습니다. “너에게 이미 주어진 지혜를 활용해서 결정하면 내가 밀어줄게”라는 응답입니다. 또 하나는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너는 손 떼”입니다. “너는 이제 그만 생각해”라고 믿음으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영역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일곱 명이 믿음과 지혜가 충만해서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섬기는 사람으로 세워졌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교회 안에 신실한 리더들, 믿음과 지혜가 충만한 리더들이 계속 세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두 가지 열매인 지혜와 믿음은 교회 리더십으로 세움을 받는 중요한 자질입니다. 문화적 차이가 있는 사람들을 끌어안다 셋째, 그들은 문화적 차이가 있는 사람들을 끌어안았습니다. 앞서 그리스파 사람들이 명단에서 빠졌다는 것이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5절을 보면 일곱 사람들의 명칭이 모두 그리스식 이름입니다. 스데반은 스테파노스(면류관)입니다. 빌립, 브로고로, 니가노르, 디몬, 바메나, 그리고 안디옥 사람 니골라입니다. 안디옥 사람임을 강조하는 것은 이 사람이 완전히 이방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종한 니골라를 새롭게 리더십을 뽑았습니다. 유대인, 예루살렘 출신, 익숙한 문화권에 있는 이들이 아닌 사람 가운데 리더를 세웠습니다. 그동안 소외감을 느끼고, 상처가 있고, 불평이 있었던 문화권 중심에 있는 사람들을 리더십으로 세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인들도 함께 리더십으로 참여하는 다문화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이 시대 한국 교회, 온누리교회도 개선되어야 할 부분입니다. M미션이나 이주자들이 와서 이제는 다문화 공동체가 익숙해졌습니다. 많은 다문화 사람이 있습니다. 한국에 오래 거주하면서 한국인으로서 살아가는 분들이 있다면, 그분들도 온누리교회 리더십으로 세워 드리고, 넓은 다문화 공동체가 이루어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실 우리는 같은 인종, 같은 문화 사람들끼리만 어울립니다. 사실 그것이 편합니다. 사회는 다문화 사회인데 교회는 단일문화가 지속되기를 고집했습니다. 그것은 성경적인 모습이 아닙니다. 그들의 결정을 보십시오. 당시 유대문화 중심적인 공동체에서 굉장히 파격적인 결정입니다. 새롭게 세워진 일곱 명을 모두 그리스파 사람들로 세웠다는 것이 지혜가 충만한 것입니다. 믿음이 충만한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다문화사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것을 잊어버리고 한국인만 생각한다면 교회 정체성의 심각한 위기가 올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공동체 일원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배타적인 교회가 된다면 한국 교회가 선교적인 공동체로 쓰임 받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리스파 사람들이 명단에서 누락되고 갈등이 생겼지만, 그리스파 사람들에게 더 친숙한 리더십을 세우고, 서로 끌어안는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그 덕분에 초대 교회에 갈등이 일어났지만 그 갈등이 부흥의 촉매제가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갈등이 부흥의 촉매제로!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말씀은 계속 널리 퍼져 나갔으며 이로써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의 수도 많이 늘었고 더욱이 수많은 제사장들도 이 믿음에 순종하게 됐습니다”(7절). 말씀이 계속 퍼져나갔고, 믿는 사람이 늘어났고, 심지어 제사장들도 많이 믿게 되었습니다. 부흥의 파도가 일어난 것입니다. 공동체 안에 있던 갈등이 심각해져서 깨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흥의 파도가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신실한 일곱 명이 세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등장합니다. 스데반입니다. 사도들의 영향력보다 스데반의 영향력이 더 컸습니다. 이분에게 꼭 붙여지는 별명이 ‘충만’입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고, 믿음과 지혜가 충만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충만합니다. 그래서 이분을 통해 표적과 기적이 나타나고, 그분이 말씀을 전할 때 수많은 영혼이 돌아왔습니다. 예수님이 억울하게 심문받은 것처럼 스데반이 성전과 율법에 대해 험담을 한다는 누명을 쓰고 공회원들 앞에 섭니다. 그때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습니다. 얼마나 긴장되는 순간입니까? 자신을 잡아먹을 듯 고소하고, 억울하게 몰아세우는 그들 앞에서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고 합니다. 누군가 여러분을 해치려고, 공격하려고 달려드는 사람에게 천사의 얼굴을 할 수 있을까요? 이것이 충만입니다. 충만이란 흘러넘친다는 의미입니다. 우러러 나온 것입니다. 이것이 충만입니다. 우리가 바라봐야 할 귀한 믿음의 모습입니다. 우리 교회가 담대한 증인이자 온화하고, 평화롭고, 대적하는 이들 앞에서 천사의 얼굴을 할 수 있는 충만함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초대교회에 갈등이 있었지만 갈등을 녹여내고, 우선순위를 놓치지 않고, 올바른 사람들을 세우고, 서로의 차이를 끌어안았을 때 갈등이 오히려 부흥의 촉매제가 되었습니다. 공동체에 때로는 갈등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때 공동체가 서로 끌어안는 모습으로 부흥의 역사가 일어난 것처럼, 서로를 끌어안는 일들이 우리 가운데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2024-04-13 제1487호
[주일 강단] 부활 생명의 삶 부활 생명의 삶 고린도전서 15:19~24 / 이재훈 위임목사 오늘 본문은 ‘부활 장’이라는 별명이 붙여진 <고린도전서> 15장입니다. <고린도전서> 전반부 말씀은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후반부 말씀에서는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임을 뛰어넘어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이 이 세상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믿는 성도들이 부활의 생명으로 살도록 역사하는 사건 첫째,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그 대답은 ‘그것을 믿는 성도들이 현재 부활의 생명으로 살도록 역사하시는 사건’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가진 소망이 이 세상의 생명뿐이면 모든 사람들 가운데 우리가 가장 불쌍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잠자는 사람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19~20절). “만일 이 세상의 생명만을 바라는 소망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우리가 가장 불쌍한 사람들일 것입니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인하여 우리는 이렇게 바꾸어 읽을 수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부활로 인하여 그분을 믿는 이들에게 생명이 주어졌기에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는 가장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 ‘첫 열매’란 유대 절기 가운데 초실절을 설명합니다. 곧 첫 곡식 다발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다가올 추수에 대한 확신과 감사를 드리는 절기입니다. 예수님이 초실절의 성취입니다. 보리 추수 한 단이 하나님 앞에 드려진 것처럼, 예수님이 첫 번째 열매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를 믿는 모든 이들의 부활이 약속되고 보증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단지 미래의 부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 지금, 오늘 부활의 생명으로 살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셨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은 과거 죽음 이전으로 되돌아간 것이 아닙니다. 이전에 경험하지 않으셨던, 성육신하시기 전에는 누리지 않았던 생명, 부활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그 생명은 그분을 믿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나누어 주실 수 있는 생명으로 부활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은 미래에 그분과 같이 부활할 것이고, 현재 부활하신 예수님이 사셨던 그 생명의 능력으로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엄청난 변화와 변혁입니다. 우리가 창조된 생명일 뿐만 아니라, 창조된 존재일 뿐만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이 독생자를 나으셨던 것과 같이 우리도 태어나는 존재로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생물학적, 자연적 생명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변화되는 일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것은 단순한 어떤 개선이 아닙니다. 근본적인 변형입니다. 완전히 새로운 종류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C.S.루이스가 예수님의 부활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예전 단계에서 생명 유기체들은 새로운 단계로 나가는 길에 선택권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피조물이 아들로 바뀌는 이 변화, 그것은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다. 거부할 수도 있다는 뜻에서 선택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새 사람’의 최초의 사례이다. 그러나 그는 그 이상의 존재이다. ‘한 새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 새 사람’이다. 그는 모든 새 사람의 기원이며 중심이자 생명이다. 그는 조에(ZOE; 영원한 생명)를 유전이 아니라 좋은 전염(믿음)을 통해 전달하신다.” 그것을 우리의 믿음을 통해 전달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C.S.루이스가 <순전한 기독교>에서 ‘굿 인펙션’이라는 제목으로 ‘좋은 전염’이라는 비유를 들었는데, 믿음은 전염과 같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그분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이 우리 가운데 전염됨으로써 바로 그 새 사람이신 그분 안에 있는 생명을 우리 모두가 함께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함께 살리셨고, 함께 일으키셨고,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 사도 바울은 서신서 여러 곳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을 우리가 현재 누리게 되었다는 것을 ‘예수님과 함께 살아났다. 예수님 함께 살리심을 받았다’는 표현으로 반복해서 사용했습니다. <에베소서>와 <골로새서>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나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크신 사랑으로 인해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여러분은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일으키시고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다가오는 모든 세대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지극히 풍성함을 보여 주기 위한 것입니다”(엡 2:4~7). ‘함께’가 세 번 반복됩니다. 함께 살리셨고, 함께 일으키셨고,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미래에 일어날 일이 아니라 현재 우리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본문을 잘 보십시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실 것’이라고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과거형으로 표현한 것은 현재 우리가 살아난 상태로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미래에 ‘함께 살리실 것’이라고 미래의 부활만을 약속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리셨다’고 말씀합니다. 영어로 표현했다면 모두 현재완료형으로 사용했을 것입니다. 과거에 일어난 사건이 현재 계속해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은 죽음을 통과해서 얻은 부활의 생명이며, 지옥과 마귀와 세상과 육신을 정복한 생명이기에 미래의 부활만이 아니라 현재 함께 살리셨고, 일으키셨고, 하늘의 앉힌 바가 된 상태라는 것입니다. <골로새서>에서도 동일한 맥락의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니 위에 있는 것들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위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지 마십시오”(골 3:1~2).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니’ 우리는 하늘에 앉힌 바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현 주소는 땅이 아니라 하늘이라는 것이고, 하늘에 앉아있는 상태로 살아감으로 위의 것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장차 미래에 부활이 약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현재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능력을 전염 받고, 이식받아 부활의 생명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때 모든 권세를 멸하시고, 온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회복시킬 사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두 번째 질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 세상에 대하여 어떤 의미가 있는가?”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세상의 마지막이 오게 될 그때 모든 권세를 멸하시고, 온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회복시키실 사건입니다.” “그다음에 세상의 마지막이 올 것인데 그때는 그분이 모든 권력과 권세와 권능을 멸하시고 그 나라를 하나님 아버지께 바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원수들을 그리스도의 발아래 두실 때까지 다스리셔야 합니다”(24~25절). “만물을 그분께 복종하게 하신 때는 아들 자신도 만물을 복종하게 하신 분에게 복종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만유의 주가 되시려는 것입니다”(28절). 나중에 일어날 변화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부활하심으로부터 시작해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세상의 종말 때까지 하고 계신 일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온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구속하시는 일을 행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권세를 멸하시고, 온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회복시키시는 일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지금 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승리가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역사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이 땅에는 사단의 세력, 하나님에게 대적하는 사단의 권세가 아직도 하나님의 통치에 반역하고, 죄와 죽음을 이용해서 하나님께 대항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예수님의 부활로부터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완전히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기간에 사단의 세력들을 어떻게 하나님이 소탕해 가시는지, 우주를 하나님의 주권 아래 완전히 회복시켜 가시는 일을 행하고 계신 것을 환상으로 보여줍니다. 그래서 전투가 나오고,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보좌 앞에 드리는 참된 예배자 행렬이 나오는 것입니다. 디데이(D-Day)와 브이데이(Victory Day) 여러분, 이 세상은 지금 전쟁의 한복판에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까지,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가 온 세상에 임하도록 지금 역사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이것을 2차 대전 마지막에 있었던 ‘디데이(D-Day)’와 ‘브이데이(V-Day)’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2차 대전 당시 연합군이 독일군에 결정적으로 승리하게 된 것은 노르망디 상륙 작전의 영향입니다. 1944년 6월, 프랑스 노르망디 해안에서 독일군을 결정적으로 무찌른 그 전투의 승리로 인하여 이미 2차 대전은 연합군의 승리로 결정되었습니다. 이날을 ‘디시전 데이(Decision day)’ 또는 ‘D-Day’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2차 대전의 완전한 승리가 이루어진 것은 1945년 5월 8일 베를린이 함락되었을 때입니다. 독일군이 완전히 포기함으로 연합군이 승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거의 1년 동안 전쟁이 지속되었습니다. 그래서 1945년 5월 8일을 ‘브이데이(Victory Day)’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D-Day와 V-Day는 다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무엇입니까? D-Day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완전한 승리로 임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는 세력들이 이 땅에 잔존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V-Day가 언제입니까? 부활하신 그분이 재림하시는 그날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회복되는 그날이 승리의 V-Day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D-Day입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V-Day, 마지막 승리의 날까지 하고 계신 일이 있습니다. 이 물리적인 세계는 마지막 V-Day에 해체되고,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그 기간에 사탄의 권세를 완전히 진멸하는 일을 예수 그리스도가 하고 계신 것입니다. C.S.루이스가 그의 책 <기적>에서 부활을 설명할 때 ‘새로운 자연’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지금의 자연 위에 새로운 자연이 존재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 새로운 자연의 문을 연 최초의 사건이다.” 새 하늘과 새 땅, 하나님은 새로운 자연을 우리를 위해 준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완전한 예배와 통치를 받는 새로운 자연으로 들어가셨고, 우리도 그 새로운 자연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에수 그리스도가 영광 가운데 나타나실 때 새로운 자연이 온전히 우리에게 나타날 것입니다. 승리의 날(V-Day), 우리가 누릴 세 가지 모습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도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 가운데 나타날 것입니다”(골 3:3~4).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가운데 감춰져 있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안 보입니다. 육신의 생명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나타나실 때,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와 함께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다가올 그 영광의 날, V-Day(승리의 날)에 누릴 그 승리를 바라보게 될 때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까요? 우리가 누릴 세 가지 모습이 있습니다. 첫째, 그들은 깨어있게 됩니다. 부활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에 깨어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들 안에 있기에 깨어있는 것입니다. 신랑을 맞이하는 신부처럼, 깨어있는 청지기처럼 그들이 깨어있게 됩니다. 둘째, 그들은 근신하는 이들입니다. 세상과 사탄은 예수님이 세상의 마지막 날 오실 때 우리가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그리고 감격스럽게 만나도록 그냥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승리의 날에 완전히 진멸될 사탄들이 자신들과 함께 하나님을 대적하는 무리에 한 명이라도 더 포함되도록 지금 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근신합니다. 그들은 사탄에게 넘어가지 않습니다. 셋째, 무장된 이들로 살아갑니다. 깨어 있든지, 자든지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감으로 인해서 우리에게 주신 부활의 생명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 생명은 미래의 변화만이 아니라 현재의 능력입니다. 또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을 완전히 통치하시는 날을 우리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찬양하고,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 거하며, 부활하신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이 능력이요, 축복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함께 기뻐하고, 부활의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2024-04-06 제1486호
[온누리가 함께 보낸 ‘장애인주일’] 사랑, 친절, 배려, 관심으로 하나 된 축복의 장(場) 온누리가 함께 보낸 ‘장애인주일’ 사랑, 친절, 배려, 관심으로 하나 된 축복의 장(場) 온누리가 함께 ‘장애인주일’을 보냈다. 지난 4월 20일(토)과 21일(일) 온누리교회 곳곳에서 ‘사랑’, ‘친절’, ‘배려’, ‘관심’을 주제로 장애인의 달 캠페인을 하고, 주일예배에서는 장애인들이 특순을 선보였다. 각 캠퍼스에서는 굿윌스토어 기증 캠페인이 열렸다. 그야말로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하나 된 축복의 장(場)이었다. / 김다애 기자 daa2@onnuri.org 올해 온누리교회 장애인 주일 주제는 ‘사랑’, ‘친절’, ‘배려’, ‘관심’이었다.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오해에서 벗어나고, 그들을 하나님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대하는 게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그 주제처럼 장애인들을 사랑하고, 친절하게 대하며, 배려와 관심이 생겼다고 고백하는 성도들을 참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첫 번째 주제는 ‘사랑’이었다. 장애인에 대한 올바른 명칭을 사용하고, 그들을 이해하는 게 바로 그들을 향한 사랑 표현이다. 장애인을 ‘장애우’, 비장애인을 ‘일반인’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는데 틀렸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라는 명칭이 옳다. 가끔 돌발행동(때리기, 소리 지르기 등)을 보이는 장애인을 만나면 이상하게 여기지 말고 그들을 이해하고, 사랑의 눈으로 바라봐야 한다. 장애인은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있어서 말로 표현하기보다 행동이 먼저 나오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박마광 형제(SNS청년부)는 고등학생 시절부터 장애인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지금은 사랑부에서 장애인들을 섬기고 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일상에서 만나는 기회가 더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사랑부를 섬기면서 느낀 점이 많습니다. 제가 낯을 많이 가리는데, 어느 날 장애인 청년이 먼저 제 손을 잡아줬습니다. 그날 그와 함께 손을 잡고 찬양하고, 예배드리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서로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해주는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앞으로도 장애인들을 섬기면서 그 아름다운 경험을 계속하고 싶습니다.” 두 번째 주제는 ‘친절’이었다. 장애인들을 향한 구체적인 사랑 표현 방법이 친절이다. 예를 들어 엘리베이터에서 장애인을 만나면 그가 먼저 내리거나 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친절이다. 정립원 성도(중국어예배공동체)는 장애인 주일을 보내면서 장애인에 대한 시선이 완전히 달라졌다. “화장실에 걸린 ‘4월 장애인의 달 캠페인’ 포스터를 봤습니다. 그 포스터를 보기 전에는 장애인에 대한 정확한 명칭을 잘 몰랐는데, ‘장애인’과 ‘비장애인’으로 불러야 한다는 것을 새롭게 배웠습니다. 장애인이 공공장소에서 소리를 지르면 이해하지 못하고 지나칠 때가 많았는데, 이제는 장애인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볼 것입니다. 엘리베이터에서 장애인을 먼저 배려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앞으로 장애인에게 더욱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친절하게 대하고 싶습니다.” 세 번째 주제는 ‘배려’였다. 장애인들에게 양보하는 미덕이 바로 배려다. 예를 들어 주일에 휠체어를 사용하는 장애인이 교회 주차장을 먼저 사용하도록 양보하고, 화장실도 장애인이 우선 사용하도록 양보하는 게 배려다. 박은희 성도(고양은평공동체)는 장애통합 어린이집에서 근무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번 장애인 주일이 더욱 뜻깊게 느껴졌다. “장애인들은 이동이 자유롭지 않고,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배려해야 합니다. 온누리교회 예배당에 장애인들을 위한 휠체어석이 있어서 참 좋습니다. 영아부터 성인까지 장애인들이 예배드릴 수 있는 사랑부가 있다는 것도 참 감사합니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이 있는데, 그 시선이 관심과 사랑으로 바뀌기를 소망합니다.” 네 번째 주제는 ‘관심’이었다. 교회에서 보호자 없이 혼자 다니는 발달장애인을 만나면 부모나 선생님을 찾으러 같이 가자고 말을 걸어주는 게 관심이다. 목회지원실 담당 간사를 찾아가도 된다. 오미영 성도(예수사랑부)는 15년째 예수사랑부를 섬기고 있다. 그녀가 예수사랑부를 오래 섬기는 이유가 있다. 장애인들을 섬기면서 받는 은혜가 크기 때문이다.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많고, 장애인이 무섭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장애인을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마음이 아픕니다. 그러나 사랑부에서 장애인들을 섬겨보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섬기면서 받는 은혜가 훨씬 큽니다. 장애인을 무섭다고 생각하거나 피하지 말고, 관심과 사랑으로 섬겨주십시오.” 사랑부 학부모의 간증 사랑 듬뿍 받고 자란 ‘한 아이’ “한 아이를 키우는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한 아이가 태어나서 사회 일원으로 자라도록 많은 사람이 끊임없이 살피고 교육해야 한다는 의미다. 성인이 되어도 자립해서 살아가기 힘든 연약하고, 부족함이 많은 장애인에게는 더 필요한 과정이다. 2015년 초등학교 4학년인 둘째 아이를 양재온누리교회 사랑부에 등록시키면서 우리 가족도 온누리교회에서 예배드리게 되었다. 전에는 동네 작은 교회에서 아이와 함께 예배를 드렸는데, 아이가 성장하면서 눈높이에 맞는 예배의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장애 아이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품어주고, 일대일로 돌봐주시며, 함께 예배드리는 사랑부 교사들 덕분에 우리 가족도 아이로 인한 분산되는 마음 없이 하나님께 온전히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매년 여름캠프를 위해 사랑부 교사들은 여름휴가를 반납하고, 2박 3일 동안 온전히 아이들을 섬겨주신다. 그 덕분에 그동안 잘 챙겨주지 못한 큰아이와 잠시나마 추억을 만들 수 있었다. 착석도 제대로 안 되고, 가끔 이상한 소리를 내는 둘째 아이를 데리고 순예배에 참석하면서 ‘내가 아웃리치를 가고,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순원들이 부담을 덜어주셨다. 아이를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의 시선으로 바라봐 주셨다. 밤늦은 시간까지 순예배를 드리는 동안 아이가 집사님 댁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가끔 냉장고에서 음료수도 꺼내 마셨다. 그 아이에게 순원들이 사랑을 듬뿍 주셨다. 어느새 그 아이가 우리보다 순예배를 더 사모하고, 주말이면 사랑부 예배를 간절히 기다렸다. 이제는 차분히 앉아서 예배드리게 되었다. 공동체에서 긍정적이고 좋은 경험이 함께 살아가야 하는 사회성 발전에 많은 도움을 줬었다. 특수학교 중학교 진학을 위해 일대일 면접이 있었는데, 면접관 선생님이 아이가 낯선 곳에 대한 두려움이나 사람들에 대한 경계심이 거의 없다면서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것 같다고 하셨다. 우리 가족이 공동체에서 받은 큰 위로와 격려, 사랑을 사랑부 부모님들과 아이들도 받기를 소망했다. 그래서 아이들과 사랑부에 오신 부모님들이 교회에 등록하고, 공동체 순예배에도 참석할 것을 적극적으로 권면했다. 지난해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을 때 방과 후에 이용하는 센터 원장님이 아이가 성실하고 운동능력이 뛰어나다면서 장애인 의무고용인 직장 운동부 취업에 대한 정보를 주셨다. 협회에 수영선수로 등록하는 것을 도와주셨다. 취업에 필요한 모든 서류를 제출하고,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사랑부 목사님과 교사들, 공동체 식구들이 한마음으로 기도해 주셨다. 모든 단계가 순탄하게 진행되었다. 하나님은 한없이 부족하고 연약한 ‘한 아이’를 위한 모든 기도에 신실하게 응답하셨다. 지난달 4대 보험과 64세 정년이 보장되는 기업에 채용되었다. 이 모든 일을 앞서 행하시고 친히 이루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아이가 무사히 학령기를 마치고, 사회 일원으로 살아가는 발걸음을 내딛도록 함께 기도해 주시고, 사랑으로 섬겨주신 사랑부 교사들과 장애 아이를 키우는 어려움을 함께 나누면서 기도해 온 사랑부 어머니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장애 아이를 키우면서 많은 한계가 있었지만, 아이와 함께 교회에 잘 정착해서 하나님을 따르고, 섬길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신 공동체 식구들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저희 가정을 기억해 주시고, 한결같은 기도로 힘을 실어주신 성도님들께도 감사하다. 연약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게 하시고, 도움이 필요한 지체들을 돌보게 하시며, 함께 예수님을 따르고 섬기는 자들로 축복하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린다. / 김영숙 성도(강남B공동체)
2024-04-27 제1489호
[르포 -굿윌스토어 도봉점을 가다] “장애인에게는 일자리가 행복이자 기쁨입니다” 르포 -굿윌스토어 도봉점을 가다 “장애인에게는 일자리가 행복이자 기쁨입니다” 굿윌스토어 기증 캠페인에 적극 참여해야 하는 이유 온누리교회가 4월 21일과 28일 ‘굿윌스토어’ 기증 캠페인을 한다. 온누리교회는 매년 4월 재사용이 가능한 의류, 신발, 잡화, 생활용품 등을 기증하는 굿윌스토어 캠페인에 동참하고 있다. 굿윌스토어 캠페인에 참여하는 교회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할 정도로 그 참여도가 높다. 성도들이 재사용이 가능한 물건을 기증하면 굿윌스토어 매장에서 판매하고, 그 재원으로 장애인들의 일자리가 창출된다. 장애인들의 자립을 돕는 꼭 필요한 캠페인이 아닐 수 없다. 성도들의 굿윌스토어 캠페인 참여가 실제 장애인들에게 어떤 영향과 변화가 있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굿윌스토어 도봉점을 찾아갔다. / 김다애 기자 daa2@onnuri.org 임승진 형제(영업팀)는 굿윌스토어에서 일한 지 11년차다. 굿윌스토어에 오기 전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는데, 지금은 굿윌스토어 영업팀 에이스이자 수어 통역사로 활약하고 있다. 임승진 형제가 처음부터 수어를 할 줄 알았던 것은 아니다. 굿윌스토어에서 일하면서 배웠다. 수어를 배우는 게 마음처럼 되지 않아서 울기도 많이 울었는데, 지금은 명실상부한 굿윌스토어 도봉점의 대표 수어 통역사다. “전에는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일했는데 사람들과 관계가 너무 어려웠습니다.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사람들이 저를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10년 전 목사님 추천으로 굿윌스토어에 왔는데 이곳에서 일하는 게 정말 행복합니다. 물론 처음에는 적응하기가 어려웠는데, 직장 동료들과 관계가 좋아서 기쁜 마음으로 일할 수 있었습니다. 장애인이 직장을 구하는 일이 참 어려운데 굿윌스토어에는 장애인의 취업 문이 활짝 열려있어서 정말 좋습니다. 영업팀에서 저의 장점을 잘 발휘할 수 있고, 수어로 청각장애인들과 비장애인들이 소통하는 것을 도울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최재훈 형제(물류팀)는 대학 시절 공사장에서 아르바이트하다가 추락사고를 당했다. 몇 년 동안 재활치료를 받았는데, 그 과정에서 우울증이 심하게 왔다. 결국, 정신장애 판정을 받았다. 그는 도봉구 보건소에서 바리스타 교육을 배워서 굿윌스토어 매장에 있는 카페직원으로 취업했다. 지금은 물류팀으로 부서를 옮겼다. 그는 날마다 “직장을 다니는 일상이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지 모른다”고 고백한다. “아침에 일어나서 일하러 갈 곳이 있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일상을 보내는 것 자체가 얼마나 큰 감사인지 모릅니다. 굿윌스토어에 오기 전에 다른 일을 많이 했는데, 나쁜 상사를 만나거나 불가피하게 퇴직했습니다. 제가 정말 힘든 상황에 있을 때 굿윌스토어를 알게 되었습니다. 굿윌스토어에서는 장애인들이 마음껏 일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얼마 전에 자립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자립한다는 게 두렵기도 했는데 막상 해보니까 별거 아니더라고요.(웃음) 함께 일하는 장애인 직원들에게도 얼마든지 자립할 수 있다는 용기와 희망을 주고 싶습니다.” 하지수 자매(콜센터)는 4년 전 대인기피증이 심했는데 극복하고, 취업에 도전하기로 했다. 가족과 굿윌스토어에 물건을 사러 갈 때마다 ‘여기서 일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 바람대로 이루어졌다. 굿윌스토어에서 전화로 고객을 응대하는 일이 어려울 법도 한데 하지수 자매는 늘 친절을 잃지 않는다. “엄마랑 언니랑 물건사러 왔던 굿윌스토어에 취업했을 때 정말 기뻤습니다. 굿윌스토어는 직원들을 많이 배려해 주고, 함께 일하는 직장 동료들이 좋아서 일하는 게 즐겁습니다. 게다가 다양하고 좋은 물건을 값싸게 살 수 있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콜센터에서 고객을 응대하는 일이 힘들 때도 있지만, 저만의 노하우를 살려서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제가 언제나 웃으면서 말해서 듣는 고객들의 기분이 덩달아 좋아진다는 칭찬을 많이 듣습니다.” 홍서윤 자매(사무보조)는 굿윌스토어 7년 차 직원이다. 전에는 인쇄소에서 일했는데 회사가 폐업하면서 일자리를 잃었다. 다시 일자리를 찾던 중에 굿윌스토어 사무보조 채용 공고를 보고 곧바로 지원했다. 다시 취업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굿윌스토어에서 일할 수 있어서 감사하고, 매우 만족한다고 고백했다. “장애인은 일자리를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굿윌스토어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일할 수 있어서 정말 좋습니다. 함께 일하는 직원들이 모두 좋아서 편안한 마음으로 일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마음 편안하고, 안정적인 직장을 다닐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굿윌스토어가 정말 좋습니다.” 장은혜 과장(굿윌스토어 도봉점)이 온누리교회 성도들이 왜 굿윌스토어 기증 캠페인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했다.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소외된 장애인들에게는 일자리 그 자체가 행복이자 기쁨이기 때문이다. “장애인들이 직원으로서 인정받고, 비장애인과 동등하게 일할 수 있다는 게 굿윌스토어의 가장 큰 장점입니다. 온누리교회 성도님들이 재사용이 가능한 물건을 적극적으로 기증하면 장애인들의 일자리가 만들어집니다. 장애인들이 자립하도록 돕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작은 물건 하나라도 기증하고, 매장을 방문해서 구매해주시면 그것이 곧 장애인들의 자립을 돕는 것입니다. 굿윌스토어 기증 캠페인에 많은 참여를 부탁합니다.”
2024-04-20 제1488호
"이보다 큰 유익과 특별한 은혜가 없다!" -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의 유익 그리고 은혜 이보다 큰 유익과 특별한 은혜가 없다!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의 유익 그리고 은혜 온누리교회가 말씀과 더 가까워지고 있다. 그 중심에 ‘공동체 성경읽기’가 있다. 지난 3월 4일부터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 ‘공동체 성경읽기 개별 모임’, ‘순 공동체 성경읽기’가 이어지고 있다. 특히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는 매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오전 6시 30분 서빙고온누리교회 비전홀에서 진행되는데, 그 유익과 은혜가 벌써 풍성하다.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에 나오는 성도들에게 그 고백을 직접 들을 수 있었다. / 김다애 기자 daa2@onnuri.org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에 참석만 해도 성경일독을 할 수 있습니다.” “이보다 큰 유익과 특별한 은혜가 어디 있냐”고 고백하는 성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큼 성경일독이 말처럼 쉽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일독을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의 크고 특별한 은혜로 손꼽을 수밖에 없다.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에서는 <우리말성경>으로 매일 신약과 구약을 함께 듣고, 읽는다. 5분 찬양, 15분 공동체 성경읽기, 5분 메시지, 5분 합심기도 순으로 예배가 이어진다.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를 경험한 성도들이 한 목소리로 “함께 예배의 자리에서 성경을 듣고 읽으면서 누리는 은혜가 정말 특별하다”고 고백했다. 김국중 집사(강촌공동체)는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면서 비로소 말씀 읽는 즐거움을 알았다. 그 즐거움이 얼마나 크고 좋든지 매일 새벽 교회 나오는 발걸음이 가볍기만 하다. “그동안 성경을 끝까지 읽지 못했습니다. 혼자서 성경을 읽으면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중간쯤 가서 포기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만큼 혼자 성경 읽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에 참석했더니 성경 읽기가 즐겁고 행복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참석하고 있습니다. 매일 정해진 분량의 말씀을 함께 듣고, 읽는 게 가장 좋습니다. 매일 구약과 신약을 균형 있게 읽으니까 지루하지도 않고, 재미있게 성경을 읽을 수 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시간인지 모릅니다.” 최효은 성도(일산파주공동체)는 하루의 첫 시간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했다. 더불어 함께 말씀을 듣고 읽으면서 경험하는 은혜가 풍성하다고 했다.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면서 가장 좋은 점이 하나님 말씀으로 하루를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하루를 시작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은혜를 풍성하게 누리고 있습니다. 매일 새벽 그 은혜를 기대하며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큰 화면으로 말씀을 듣고, 보면서 더욱 집중할 수 있고, 성경을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정말 좋습니다.” 김희선 성도(서빙고공동체)는 성경 읽는 좋은 습관이 만들어졌다. 분주한 삶에서 실천하기가 그토록 어려웠던 성경 읽기가 이제는 즐겁고, 받은 은혜도 깊고 넓다.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에서 받은 은혜가 기도로 이어지는 신앙의 성장도 경험하고 있다.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에서 말씀을 듣고, 읽고, 함께 기도하는 시간이 특별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더 깊이 묵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 덕분에 말씀과 기도가 균형을 맞춘 신앙생활을 할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김선경 집사(일본어예배공동체)는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면서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더욱 커졌다. 말씀을 더 듣고, 더 읽고 싶고, 더 많이 기도하고 싶어졌다.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에서 함께 말씀을 듣고, 읽고, 기도하는 것 자체가 은혜입니다.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 시간이 더 길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더 커졌기 때문입니다.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을 더욱 닮아가기를 소망합니다.” 한기인 집사(강촌공동체)는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를 한마디로 ‘날마다 새로운 은혜를 경험하는 장(場)’이라고 소개했다.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에 참석하고 나면 표현할 수 없는 평안이 가득해진다고 간증했다. “매일 아침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읽는 게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릅니다.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에서 구약과 신약, <시편>을 함께 읽는데, 날마다 하나님이 제게 새로운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하루를 말씀으로 시작하는 게 얼마나 큰 감사인지도 깨달았습니다.” 김소망 선교사(TIM)는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에서 분주한 마음을 내려놓고, 잠잠히 하나님 앞으로 나아간다. 새벽에만 누릴 수 있는 특별한 은혜가 있기 때문이다. “새벽이라는 고요한 시간에 함께 성경을 듣고, 읽고, 묵상하고, 기도할 수 있어서 정말 좋습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말씀 안에 더 깊이 들어갈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새벽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제약이 없어서 잠잠히 하나님과 깊이 교제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꼭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에 와보십시오.” 사역칼럼 공동체 성경읽기, 하나님 말씀 듣는 훈련! <느혜미야> 8장 2~3절에서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다”고 말씀한다. 실제 당시 사람들이 일정한 시간과 장소에 모여서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성경을 읽을 때 스스로 해설자로 다가가기 전에 경청자로서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게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말씀 앞에 나아갈 때 하나님이 임재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말씀을 중심으로 회복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 말씀 자체를 듣는 시간이 꼭 필요하다. 지금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구성을 크게 ‘말씀’과 ‘기도’라고 할 수 있다. 보통 예배에서는 말씀을 적게는 1절, 많게는 1장 정도 읽고, 메시지(설교)를 길게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는 것은 성경을 봉독하는 부분인데, 이 시간이 너무 짧다.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하시는 말씀을 직접 듣는 시간이 더 있었으면 좋겠다고 여기신 이재훈 위임목사님의 제안으로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가 시작되었다.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의 특징은 본문 길이가 길고, 메시지(설교)가 짧은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는 시간을 늘리고, 특별히 기억해야 할 말씀 또는 해석하기 어려운 부분을 설명하는 시간을 줄였다. 그리고 메시지(설교)가 끝나면 바로 합심기도로 넘어간다. 그래서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면 1년에 성경을 일독하는데, <시편>은 두 번, 신약은 한번 읽고도 <로마서>까지 다시 한번 읽을 수 있게 된다.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을 수도 있지만, 지속하기가 어렵다. 또한 말씀과 기도가 균형이 맞아야 하는데, 혼자서 성경을 읽다 보면 기도가 약해질 수 있다.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에서 이것을 보완할 수 있다. 함께 성경을 읽고, 목사님의 메시지를 듣고, 기도까지 연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의 가장 큰 유익은 성경을 단순히 통독한다기보다 지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훈련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자신을 나타내신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훈련이 매우 중요하다. 말씀을 듣는 시간을 늘리고, 사람의 목소리는 줄여서 말씀이 말씀하게 하고, 이를 듣는 훈련이 바로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인 것이다. 다시 말해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는 공동체가 함께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귀로 듣는 시간’이다.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에 참석해서 하나님 말씀에 더욱 귀 기울이는 훈련을 하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훈련에 동참하는 성도들이 많아지기를 바란다. 말씀과 더욱 가까워지는 성도들이 넘쳐나기를 소망한다. / 강신익 장로(공동체 성경읽기사역팀)
2024-04-06 제1486호
“우리는 십자가의 증인들!” 2024 고난주간 새벽기도회에서 만난 성도들 “우리는 십자가의 증인들!” 2024 고난주간 새벽기도회에서 만난 성도들 2024 고난주간 새벽기도회 ‘십자가의 증인들’이 지난 3월 25일(월)부터 29일(금)까지 국내 온누리교회 모든 캠퍼스에서 이어졌다. 성도들이 십자가 목걸이를 착용하고 새벽기도회에 참석해 예수님의 고난을 깊이 묵상했다. 회개의 십자가에 기도제목을 적어 못 박고, 미디어 금식과 하루 한 끼 금식기도를 하고 헌금을 봉헌했다. 2024 온누리교회 고난주간새벽기도회에서 만난 성도들의 이야기가 지금부터 시작된다. / 김다애 기자 daa2@onnuri.org 고난주간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기념하는 절기다. 부활절 하루 전 일주일을 경건하게 보내면서 예수님의 고난과 사랑을 묵상하는 기독교의 핵심 절기 중 하나다. 온누리교회 성도들은 2024년 고난주간을 아주 뜻깊게 보냈다. 십자가 목걸이를 착용하고 새벽기도회에 나와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고, 미디어 금식과 하루 한 끼 금식기도를 하고, 그 금액만큼 헌금했다. 이 헌금은 아직 십자가를 모르는 이웃들을 섬기는 일에 사용할 예정이다. 뜻깊은 고난주간을 보낸 성도들의 아주 특별한 고백이 이어졌다. 1년에 한 번 기억하는 고난주간이 아니라 평생 예수님의 십자가를 마음에 품고 살겠다는 성도, 고난주간 새벽기도회에서 경험한 예수님의 사랑을 이웃들에게 전하겠다는 고백이 이어졌다. 김명란 성도(이수공동체)는 꾹꾹 눌러 담은 기도제목을 회개의 십자가에 못박았다. 기도제목이 박힌 회개의 십자가를 보면서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새삼 깨달았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생각만 해도 감격스럽습니다. 기도제목을 적어 회개의 십자가에 못박으면서 가족들이 생각났습니다. 이 감격을 가족들과 나누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우리 가정에 복음을 전하는 선교적 삶을 살기를 소망합니다. 이번 고난주간 새벽기도회에서 예수님이 제게 특별한 마음도 주셨습니다. 저와 끝까지 동행하신다는 마음입니다. 그곳이 어디든지 예수님이 함께 가자고 하시면 무조건 순종할 것입니다.” 권기윤 성도(관악금천공동체)는 순원들과 함께 고난주간 새벽기도회에 참석했다. 고난주간 묵상한 말씀을 순원들과 나누면서 풍성한 은혜를 받았는데, 그 은혜를 섬김을 통해 나타내기로 결정했다. “교회 다닌 지 얼마 되지 않은 순원이 고난주간 새벽기도회에 나오기로 결단했다는 말을 듣고, 그 순원을 섬기려고 함께 참석했습니다. 함께 예수님의 고난과 사랑을 묵상하고, 고난주간 새벽기도회에서 받은 은혜를 정성껏 기록해서 순 단체채팅방에 나눴습니다. 순원들과 은혜를 나눌수록 은혜가 더 커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이번 고난주간을 보내면서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와 네 자녀들을 위해 울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품었습니다. 내 모습을 돌아보며 회개하고, 가정과 이웃을 위해 더 열심히 기도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시간도 보냈습니다. 고난주간을 보내며 풍성하게 받은 은혜를 섬김으로 통해 나타낼 것입니다.” 윤정희 성도(찬양공동체)는 고난주간 새벽기도회에서 오르간 반주를 섬겼다. 성도들이 예수님의 고난과 사랑을 깊이 묵상하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오르간을 연주했다. 그녀의 오르간 연주가 그토록 아름다웠던 이유가 있었다. “하나님이 제게 허락하신 시간과 재능을 오직 하나님을 높이는 데 사용하겠다고 결단하고 섬겼습니다. 그 마음으로 고난주간 새벽기도회에서 오르간 반주를 섬겼더니 예배에 더욱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연주하는 오르간 선율을 따라 하나님의 은혜가 성도들에게 흘러가기를, 온전한 예배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온전히 하나님만 드러나기를, 나는 없고 오직 예수님만 높여드리기를 소망하며 연주했습니다.” 김성엽, 이예은 부부(서빙고온누리교회)는 고난주간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면서 세상에서는 맛볼 수 없는 사랑을 경험했다고 고백했다. 그 덕분에 그들 부부의 마음에 기쁨과 평안이 가득하다. 지친 삶에서 비로소 벗어나 따듯한 예수님의 품 안에 거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알게 됐다고 간증했다. “사실 오랫동안 교회를 떠나있다가 예배의 자리에 왔습니다. 삶에서 고난을 겪고 있는데 그 힘든 마음을 내려놓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아내와 함께 밤새워 일하고 예배당에 왔습니다. 오랜만에 드리는 예배가 정말 좋았습니다. 오늘을 시작으로 열심히 교회에 나오고,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바쁜 일상에 치여 고난주간인 줄도 모르고 예배의 자리에 나왔는데, 예수님이 고난 속에 있는 우리 부부를 불러주셨음을 깨달았습니다. 앞으로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묵상하고, 그 사랑을 누릴 것입니다.” 최성연 성도(찬양공동체)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생각만 해도 정말 행복하다. 그 행복을 이웃들과 나누는 십자가의 증인이 되겠다고 선언했다. “십자가를 잊고 살 때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번 고난주간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면서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서 죽으셨는지를 새삼 깨달았습니다. 그 큰 사랑을 주신 예수님을 생각만 해도 행복합니다. 이 행복을 이웃들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이웃들과 함께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를 누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번 고난주간에 예수님이 제게 주신 마음은 ‘감사’입니다. 예수님이 저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고난주간 끝에는 예수님의 부활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정말 행복합니다. 그 행복을 이웃들에게 전하고자 열심히 전도하고 있습니다. 이 기쁨과 행복을 온 세상에 전하고 말 것입니다.”
2024-03-30 제1485호
[특집] '전도하러 기차 타는'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들을 찾아라! ‘전도하러 기차 타는’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 김양신 성도가 매주 토요일 새벽 기차를 타는 이유 <온누리신문>에서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들을 찾고 있다. 이번에는 복음 전하는 일이라면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달려가는 사람이다. 그 여섯 번째 주인공은 “예수의 사랑을 전하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다”고 고백하는 김양신 성도(강남C공동체)다. 김양신 성도는 복음 전하고, 전도자를 세우는 소망을 품고 매주 토요일 새벽 서울에서 광주광역시로 가는 기차(KTX)를 탄다. 매주 이어지는 여정이 몹시 피곤하고 지칠법한데 그녀의 발걸음이 늘 가볍다. 복음 듣고 기뻐하는 사람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정말 행복하기 때문이다. 그녀가 매주 토요일 새벽 기차를 타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 홍하영 기자 hha0@onnuri.org 김양신 성도가 한 마을회관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다. 매주 토요일 새벽 5시 8분, 김양신 성도가 기차에 몸을 싣는다. 목적지는 광주광역시다. 3년째 단 한 주도 거르지 않고 그 시간에 기차를 타고 있다. 물론 유혹이 없는 것은 아니다. ‘조금 더 잘까?’, ‘이번 주만 쉴까?’ 끊임없이 유혹이 찾아온다. 하지만 그 유혹이 김양신 성도의 전도 열정을 결코 가로막지 못한다. 복음 듣고 기뻐하는 사람들을 떠올리면 아무리 고되고 힘들어도 몸을 일으키게 된다. 그 뜨거운 전도 열정이 만든 ‘열두 명의 전도자들’ 김양신 성도는 전라남도에서 전도폭발훈련생들을(이하 전남 전도폭발훈련) 교육하는 훈련자다. 매주 광주에 가서 전도자들을 세우는 일을 하고 있다. 지역교회를 다니면서 전도폭발훈련 하기도 하고, 훈련생들과 함께 전라남도 곳곳을 누비며 전도를 한다. 각 지역 기차역과 고속버스터미널, 공원 등에서 노방전도를 하고, 지역교회의 요청이 있으면 직접 방문해서 복음을 전한다. 김양신 성도가 서울에서 첫 기차를 타고 광주광역시에 도착하면 오전 7시다. 역에 도착하자마자 친언니 집으로 향한다. 언니와 함께 간단하게 아침식사를 하고 전도폭발훈련 훈련을 한 타임 진행한다. 훈련이 끝나자마자 전라남도 함평으로 떠날 채비를 한다. 함평에서 기다리는 또 다른 훈련생들을 만나기 위해서다. 김양신 성도의 토요일은 쉴 틈이 없다. “금요일까지 일하다가 토요일 새벽에 일어나 광주에 가는 일이 쉽지는 않습니다. 정말 피곤합니다. 그래도 광주에 도착하면 하나님이 피로를 말끔히 씻어주십니다. 전도할 힘을 새로 채워주십니다. 그 덕분에 저는 광주에만 오면 힘이 솟고, 마음에 기쁨이 가득합니다. 거뜬히 해낼 힘을 하나님이 채워주시니까 이곳에 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남 전도폭발훈련에는 방학도 없다. 전도자를 한 명이라도 더 세워야 한다는 김양신 성도의 열정 덕분에 3년째 한 주도 빠짐없이 훈련하고 있다. 아무리 지치고 피곤해도, 전도폭발훈련 수업을 듣는 훈련생이 한 명이어도 달려간다. 그 열정 덕분에 처음에는 전남 전도폭발훈련생이 두 명뿐이었는데, 어느새 열두 명이 됐다. 이 열두 명의 전도자들이 전남 곳곳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다. 예수님을 전하러 땅끝까지 나아갔던 열두 사도들처럼 말이다. 가는 곳마다 기적이 일어나는 ‘마을회관’ 하루는 전남 전도폭발 훈련생들, 강남C공동체 지체들과 함께 경상남도 남해군으로 전도 아웃리치를 갔다. 천도교 사상이 깊이 뿌리 내린 어느 마을에서 사역하는 목사님의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 전국적으로 비가 많이 내리던 참 궂은 날씨였다. 걱정을 가득 안고 갔는데, 궂은 날씨마저 하나님의 계획하심이었다. “마을 어르신들 대부분 농사를 지으시는데, 비가 많이 오니까 일을 못 나가시고 마을회관에 모여 계셨습니다. 그날 세 마을을 돌았는데 마을회관에 어르신들이 가득했습니다. 마을회관에 꽉 찬 어르신들을 보면서 속으로 ‘할렐루야!’를 외쳤습니다. 그곳이 바로 전도의 황금어장이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들어야 할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지만, 그들의 마음을 여는 일은 쉽지 않았다. 평생을 천도교와 불교를 따르던 어르신들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복음을 전하려 해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급기야 김양신 성도가 비장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농사를 지으시는 분들이라 하늘과 땅, 자연에 친숙할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천지창조 이야기를 들려드렸습니다. ‘어르신, 농사하면서 비가 안 오면 어떡하나요?’, ‘낮과 밤, 계절, 날씨를 주관하시는 분이 누구실까요?’ 등의 질문을 던지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이 어르신들의 마음 문을 열어주셨다. 김양신 성도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기도를 할 테니까 마음에 인정이 되면 “아멘”이라고 대답해달라고 요청했다. 어르신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영접기도를 시작했다. 그때 어르신들이 눈물을 왈칵 쏟으며 큰 소리로 “아멘!”을 외치셨다. 어르신들이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고, 가족을 위한 기도를 했다. 그날 이후 남해에서 만난 어르신들이 두고두고 생각났다. 그리움이 너무 깊어서 남해로 2차 전도 아웃리치를 갔다. 이번에는 의료사역팀과 함께 마을회관 네 곳을 다녔다. 어르신들에게 수액을 놔드리면서 한 분 한 분에게 복음을 전했다. 1박 2일 동안 주민 80여 명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79명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다. 마을회관 전도는 계속 이어졌다. 이번에는 전라남도 영광군이었다. 마을 어르신들을 극진한 사랑으로 보살피는 어느 목사님이 사역하는 곳이었다. 그 목사님은 추운 겨울 붕어빵을 직접 구워서 어르신들께 나눠드리면서 복음을 전했다. 전남 전도폭발훈련팀이 힘을 보탰다. 어르신들의 눈높이에 맞춰 예수의 사랑을 전했다. 그다음 날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영광백수교회에 어르신 24명이 찾아오셨다. 전남 전도폭발팀에게 마을회관은 기적이 일어나는 곳이다. “이것이 전도의 참맛!” 김양신 성도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라면 어디든 가고, 누구든 만난다. 어느 날은 광주요양병원에서 생활하시는 97세 어르신에게 복음을 전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남편의 구박 속에서 7남매를 홀로 키우며 힘들게 살아온 어르신이었다. 그 어르신은 평생 절에 가서 자신의 마음을 토로하고 의지하며 지내셨다. 교회 다니는 자녀들이 전도하려고 하면 “다른 종교를 믿는 것은 부처를 배신하는 일”이라며 한사코 반대하셨다. 자녀들이 목사나 전도사와 함께 방문해도 문전박대당하기 일쑤였다. 그 어르신을 만나러 김양신 성도가 갔다. “쫓겨날 각오를 하고 요양병원에 갔습니다. 가는 길에 복음을 어떻게 전하면 좋을지 고민이 됐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저에게 병상에 누워계신 어르신에게 위로의 말씀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르신 그동안 힘드셨지요?’라고 물으며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평생 이웃 종교를 섬긴 마음을 알고 갔기에, 예수님을 믿는 일이 부처를 배신하는 일이 아니라는 설명했습니다. 그 어르신이 제 이야기를 쭉 들으시고, 영접기도를 하기로 했습니다. “제 말이 인정되면 두 눈을 크게 떠 달라”고 말씀드렸는데 그 어르신이 기도 한 문장마다 두 눈을 보름달처럼 크게 뜨시며 환하게 웃어주셨습니다.” 한번은 함평에 사는 한 남자를 만나러 갔다. 그는 많은 신을 섬기는 사람이었다. 집에 온갖 불상이 가득했다. 그는 세상의 수많은 신을 섬겼지만, 예수만은 거부했다. 어릴 적 교회에 다니다가 상처받은 기억 때문에 교회와 척을 지고 살았다고 했다. 그에게 김양신 성도가 복음을 전했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 형제님이 처음에는 자신이 섬기는 다른 신들처럼 ‘한번 알아나 보자’는 생각으로 제 이야기를 들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놀라운 방법으로 그 형제님을 만나주셨습니다. 제가 부정맥이 있는 그 형제님의 말씀을 듣고 가슴에 손을 얹고 기도해드렸는데, 그 형제님이 ‘선생님이 믿는 신이 내가 믿는 신보다 강한 것 같습니다! 내 몸에서 귀신이 나가는 걸 느꼈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에게는 귀신을 쫓는 은사나 치유의 은사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많은 신을 섬기는 그 형제님의 상황에 맞춰 기적을 베푸신 것 같습니다. 제가 그 일에 쓰임 받는 것입니다.” 그날 이후 그 남자는 예수를 깊이 만났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신은 하나님!”이라고 외치는 전도자가 됐다. 이처럼 수많은 전도 성공 사례가 있으면 으쓱할 법한데, 김양신 권사는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라는 의미였다. 그리고 이 말을 덧붙였다. “전도는 절대 제가 하는 일이 아닙니다. 모두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을 보내시며 ‘내가 너희와 함께 가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모든 장소에 예수님이 함께 계십니다. 전도는 절대 우리의 지혜와 능력으로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담대히 나아가면 그 이후 일은 예수님이 책임지십니다. 온누리교회 모든 성도가 예수님을 의지해서 담대히 나아가 복음을 전하고, 전도의 참맛을 경험하기를 기도합니다.”
2024-04-06 제1486호
[특집] '선교지로 떠난'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들을 찾아라! ‘선교지로 떠난’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 김숙경 권사의 ‘아프리카 우간다 한 달 살이’ <온누리신문>에서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들을 찾고 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이웃의 손을 잡아주고, 이주민을 보살피고, 선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복음 전하는 일이라면 오지에 가는 일도 서슴지 않는 주인공도 만난다. 그 다섯 번째 주인공은 김숙경 권사(서빙고공동체, NGO 더멋진세상 실행위원)다. 김숙경 권사는 아프리카 우간다에서 의료사역과 더불어 현지 교회 청년들의 신앙 교육에 힘을 쏟았다. 김숙경 권사의 가슴 뜨거운 ‘아프리카 우간다 한 달 살이’ 이야기다. / 홍하영 기자 hha0@onnuri.org “권사님, 우간다 함께 가실래요?” 2024년 새해가 시작되기 며칠 전, 김숙경 권사에게 메시지가 왔다. 매년 명절에 선교지로 의료사역을 가는 어느 병원 원장이 보낸 메시지였다. 올해 구정 연휴에는 NGO 더멋진세상의 사역지인 아프리카 우간다 북쪽에 있는 남수단 난민촌에 간다고 했다. 김숙경 권사가 NGO 더멋진세상 실행위원이기도 하고, 선교에 관한 일이라면 자다가도 눈이 번쩍 떠지기에 한치의 망설임 없이 “Yes!”를 외쳤다. 그때까지만 해도 김숙경 권사의 우간다 의료사역 일정은 일주일 남짓한 시간이었다. 그녀의 의료사역 일정이 한 달로 늘어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우간다 산골에 있는 구피마을, 하나님이 사랑하는 베드로교회로! NGO 더멋진세상이 의료사역을 하는 남수단 난민촌은 아프리카 우간다 북쪽 남수단 국경 지역과 가까이 있다. 김숙경 권사와 NGO 더멋진세상 의료선교팀은 남수단 근처 ‘모요’에 숙소를 잡았다. ‘모요’는 아프리카에서도 이동이 가장 힘든 지역 중 하나다. 우간다 수도 캄팔라에서 차를 타고 북쪽으로 열 시간 달리고, 중간에서 숙박한 다음, 다시 페리(ferry)를 타고 나일강을 건너야 갈 수 있는 곳이다. 김숙경 권사는 이렇게 멀리까지 와서 의료사역만 하고 돌아가기에는 못내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때 하나님이 어느 마을을 떠올리게 하셨다. 모요에서 차를 타고 30분을 더 들어가야 만날 수 있는 산골짜기 ‘구피마을’이었다. 마침 그곳에 NGO 더멋진세상에서 파송한 선교사가 헌당한 ‘베드로교회’가 있었다. “사역 일정이 너무 짧은 것 같아서 아쉬워하고 있는데 하나님이 NGO 더멋진세상 사역 보고에서 들었던 ‘구피마을’을 떠올리게 하셨어요. 하나님이 구피마을과 베드로교회가 떠오르게 하시면서 ‘내가 사랑하는 그 교회에 가지 않겠니?’라고 말씀하셨어요. 곧바로 하나님께 ‘네 알겠어요, 제가 갈게요 아버지!’라고 말씀드리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순종했어요.” 그렇게 우간다 산골에 있는 구피마을에 가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현재 베드로교회를 섬기는 선교사나 목회자가 없기 때문이다. 베드로교회를 개척했던 선교사 부부는 사역 기간이 끝나서 다른 지역으로 떠났고, 베드로교회를 관리하던 NGO 더멋진세상 우간다 지부장도 사무실을 이전해서 매주 방문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김숙경 권사가 베드로교회에서 사역하려면 숙식과 교통편을 포함한 모든 일을 혼자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70세를 코앞에 둔 여성 혼자 감당해내기에는 버거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주신 마음을 붙잡고 결단했다. 기겁하며 도망쳐 나올 법한 그곳에서 사랑에 빠지다 김숙경 권사는 이왕 들어간 그곳에서 제대로 사역하기 위해서는 그들과 함께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의료사역을 위한 한 달 비자 기간을 꽉 채워서 곧장 항공편을 3주 연장했다. 그리고 기도하며 사역계획표를 만들었다. 사역의 목적과 방식, 프로그램 내용과 진행 방법 등을 빼곡하게 적었다. 사역에 필요한 물품도 샀다. 예배를 위한 키보드, 영어판 일대일제자양육 교재, 전도용 영어 팝업책, 영어 찬송가, 영어 성경, 창조과학 교육을 위한 창조모빌, 전도를 위한 복음 팔찌와 전도지 등 현지 사역에 필요한 모든 물품을 준비했다. 자비량으로 준비하는 중에 아프리카 한 달 선교를 혼자 간다는 소식을 들은 친구들의 후원금도 들어와서 함께 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느끼며 감사했다.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드디어 우간다로 떠나는 날, 식사하다가 오래전 치료한 앞니 세 개가 부러졌다. 순간 크게 당황했지만, 치아가 부러졌다고 일정을 취소할 수는 없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구피마을에 꼭 가야 했기 때문이다. 김숙경 권사는 부러진 치아 세 개를 작은 통에 넣고 우간다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렇게 김숙경 권사의 아프리카 우간다 한 달 살이가 시작됐다. 남수단 난민촌 의료사역을 마치고 들어간 구피마을은 생각보다 환경이 훨씬 열악했다. 빗물을 받아서 식수로 사용하고 있었고,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서 밤만 되면 칠흑 같은 어둠이 사방을 뒤덮었다. 당연히 TV나 냉장고를 찾아볼 수 없었다. 문명의 흔적이 드문 오지 중 오지였다. 어지간한 사람은 기겁하며 도망쳐 나올 법한 곳에서 김숙경 권사는 행복을 찾았다. 구피마을과 사랑에 빠졌다. “흙벽돌과 흙바닥 위에 잔 나뭇가지로 지붕을 올린 우간다의 전통 가옥이 참 정겨웠어요. 무더운 날씨지만, 가끔 내리는 소나기를 맞으며 단비를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곳이에요. 들판에 자라는 푸른 나무와 풀들, 그리고 그들의 주식이 되는 까사바 열매를 쉽게 얻을 수 있는 환경은 마음에 큰 평안을 주었어요. 무엇보다 커다란 눈동자가 보석처럼 빛나는 해맑은 얼굴의 어린아이들은 너무나도 사랑스러웠어요. 구피마을은 하나님의 사랑이 창조세계 곳곳에서 발견되는 자연과 그 자연에 순응하며 성실하게 살아가는, 작은 호의에도 큰 미소로 감사하는 멋진 사람들이 가득한 아름다운 곳입니다.” “모두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제가 한 일은 순종뿐입니다” 김숙경 권사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구피마을을 찾았다. 우간다에서 김숙경 권사가 보낸 하루는 이렇다. 아침 일찍 일어나 큐티로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하고, 부러진 치아 세 개를 순간접착제로 조심히 붙인다. 그날 사용할 교재들과 전날 모요시장에서 장을 본 음식과 간식을 챙겨서 썬데이 형제의 차를 타고 모요에서 구피마을 베드로교회로 출근한다.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는 베드로교회 청년 리더들과 훈련한다. 제일 먼저 온누리교회 양육의 뿌리인 QT 훈련, 그리고 일대일 제자 훈련, 점심 식사 후에는 예배를 위한 음악 교육을 한다. 악보 보는 법과 키보드 연주법을 가르쳐 준다. 잠깐 휴식 후에는 전도 훈련을 한다. 전도 훈련이 익숙해지면 창조신앙 회복을 위한 창조과학 교육도 했다. 중고등학생들이 하교한 오후 5시부터 6시 30분까지의 교육은 먼저 찬양단을 위한 발성 훈련을 한다. 이후 시간은 청년 리더십들이 맡아서 한다. 집중력도 좋고 성실해서 기대 이상으로 훈련이 잘 진행 되었다. “베드로교회에서 사역하면서 하나님이 왜 저를 이곳에 보내셨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목회자가 없는 이 교회에 훈련된 리더십이 필요한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제가 떠난 후에도 베드로교회 청년 리더십들이 계속해서 교회를 돌보고, 다음세대를 훈련 시킬 수 있도록 그동안 배웠던 모든 것을 전수했습니다. 모든 훈련을 기쁨으로 참여한 마낫세, 패트리샤, 임마누엘의 열심에 정말 크게 감동했습니다.” 김숙경 권사는 3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베드로교회를 찾아가 청년들을 교육하고, 성도들과 어울렸다. 훈련팀과 함께 구피마을 주민들을 찾아다니며 복음도 전했다. 복음이 온 마을에 전해지기를 기대하며 전도하는 날도 만들고 전도용품도 마련해 주었다. 전하는 이나 전도 받는 이들의 얼굴에는 즐거움의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김숙경 권사의 열정이 구피마을과 베드로교회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교회 앞 학교 학생들과 선생님들을 교회로 초대해서 창조과학 강의도 했다. 아이들은 동양에서 온 아줌마를 신기해하며 매일 교회를 찾아와 함께 찬양을 했다. 이웃 전도를 하면서 만난 마이클 할아버지 가족들은 베드로교회 일원이 됐다. 베드로교회의 리더십들은 김숙경 권사와 함께 예배 순서와 진행 등 예배 과정을 재정비했다. 찬양팀을 신설하고, 어린이 주일학교 분반 담임제도를 만들었다. 모든 성도가 성경통독도 시작했다. 이 놀라운 변화를 보고도 김숙경 권사는 끝까지 겸손했다. “모두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제가 한 일은 순종뿐입니다. 제 삶의 모든 것, 구피마을에서의 일들은 은혜의 흔적들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구피마을과 베드로교회에 제가 잠시 머물 수 있었던 것을 감사합니다. 은혜와 감동이 넘치는 선교지에서의 한 달 살이를 온누리교회 성도님들께 적극 추천합니다.”
2024-03-30 제1485호
[특집] '화관 만드는'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들을 찾아라! ‘화관 만드는’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 함께, 묵묵히, 그리고 꾸준히 ‘평택 화관팀’ <온누리신문>에서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들을 소개하고 있다. 우리가 찾는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들은 대단한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기쁨으로 섬기는 사람들이다. 네 번째 주인공은 ‘평택온누리교회 화관팀’(이하 평택 화관팀)이다. 평택 화관팀은 오는 5월 열리는 러브소나타 ‘효고’에서 사용할 화관을 제작하고 있다. 스무 명 남짓 성도들이 일본 복음화를 꿈꾸며 화관을 제작하고 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기쁨으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아름다운 향기가 나는 평택 화관팀을 소개한다. / 홍하영 기자 hha0@onnuri.org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평택온누리교회 5층에서 맛있는 냄새와 익숙한 찬양 소리가 흘러나왔다.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평택 화관팀이 있었다. 스무 명 남짓한 성도들이 함께 찬양하면서 흰색, 보라색, 초록색의 예쁜 조화를 엮어 화관을 만들고 있었다. 곳곳에 흐드러진 알록달록한 꽃들과 평택 화관팀원들의 얼굴에 핀 웃음꽃이 어우러져 꽃동산에 와 있는 것 같았다. 주방에서는 맛있는 냄새가 피어나고 있었다. 그 맛있는 냄새가 향기가 없는 조화에 기분 좋은 냄새를 불어넣고 있는 것 같았다. 평택 화관팀이 있는 자리는 분명 하나님과 뛰노는 꽃동산이었다. 함께하는 기쁨이 더 크기 때문에 평택 화관팀은 오는 5월 15~16일 막 오르는 러브소나타 ‘효고’에서 사용할 화관을 만들고 있다. 화관 제작은 이름도 빛도 없이 섬기는 일 중 하나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일본의 영혼들에게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전해지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섬기고 있다. 화관 만드는 일이 그리 쉽지 않다. 글루건(Glue Gun)이 내뿜는 뜨거운 열에 화상을 입기도 하고, 반복 작업을 오래 해서 손가락 지문이 닳기도 한다. 20여 명이 화관 2천 개를 만들기에 제작 기간도 길다. 몸도 고되고 힘든 일이 한둘이 아니지만, 찬양과 미소, 감사가 끊이지 않는다. 함께하는 기쁨이 더 크기 때문이다. 송현주 집사는 평택 화관팀에서 섬기기 전까지 러브소나타를 잘 알지 못했다. 온누리교회가 일본에서 여는 큰 집회 정도로만 생각했다. 우연한 기회에 평택 화관팀에서 섬기게 되었는데, 함께하는 기쁨을 알아버렸다. “평택 화관팀에서 하루만 일해보면 ‘와!’라는 감탄밖에 안 나옵니다. ‘이렇게 사랑과 감사가 넘치는 공동체가 또 있을까?’ 싶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꽃 한 송이 한 송이에 담긴 의미를 묵상하고, 함께 찬양하며, 화관을 만드는 일이 정말 즐겁습니다. 새벽부터 나와서 작업을 하는 데 꼭 명절에 친척들이 모인 것 같습니다. 평택 화관팀이 모이는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이 얼마나 기다려지는지 모릅니다.” 옆에서 박은화 집사가 한마디 거들었다. 박 집사도 함께하는 기쁨에 빠져 2년째 평택 화관팀에서 섬기고 있다. “당연히 힘든 날도 있습니다. 매주 이틀씩 새벽부터 오후까지 작업하려면 피로가 많이 쌓입니다. 꾀를 내서 ‘하루 정도는 빠져볼까?’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화관팀에서만 경험하는 기쁨이 정말 커서 자리를 비울 수가 없습니다. 저희가 만든 화관을 쓰고 예수님을 만날 일본인들을 생각하면 주체할 수 없는 감격이 올라옵니다. 평택 화관팀은 그 기대와 감격을 함께 나누며 작업하고 있습니다.” 어렵고, 힘들고, 어색해도 묵묵히 섬기는 은혜 평택 화관팀에 어렵고, 힘들고, 어색한 상황에도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섬김을 이어가는 성도들이 있다. 임선명 집사는 지난해 말 갑작스레 유방암 판정을 받았다. 두렵고 우울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담담하고 평안했다. 하나님이 고쳐주실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수술 날짜가 바로 잡혔고, 수술도 잘 끝났다. 임선명 집사의 빠른 회복에 의료진이 놀랄 정도였다. 임선명 집사는 하나님께 감사를 표현할 방법을 찾았다. 그런데 암 환자라 치료 경과를 살펴야 하고, 항암치료 등을 해야 할 일이 생길지도 몰라서 장기적인 사역에는 참여하기가 어려웠다. “하나님께 정말 감사해서 아무것도 안 하고는 못 견디겠더라고요. 그래서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작은 자를 섬기는 일을 하라’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 마음을 가만히 묵상하는데 하나님을 모르는 영혼들을 위한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지난해 기쁜 마음으로 참여했던 평택 화관팀에 다시 참여했습니다.” ‘평택 화관팀에 돌아오기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풍성한 나눔과 교제가 정말 좋았기 때문이다. 일본을 향한 선교의 마음이 더 커졌기 때문이다. “평택 화관팀에서 섬기다 보면 화관의 꽃송이가 의미하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오고, 각자 경험한 은혜를 나누면서 신앙의 깊이를 더해갑니다. 일본 선교에 대한 마음도 커집니다. 러브소나타를 사모하게 되고, 그곳에 모일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게 됩니다.” 한경진 집사는 평택 화관팀에서 ‘한 권사’라고 불린다. 여자 성도들 틈에 남자 혼자 껴서 열심히 섬기는 모습을 칭찬하며 붙여진 애칭이다. 한경진 집사는 아직 러브소나타에 한 번도 참여하지 못했는데, 화관팀원 모집 소식을 듣고 관심이 생겼다. “사실 화관을 제작하는데 제가 할 일이 있을까 걱정했습니다. 그래도 심부름이라도 하자는 생각으로 평택 화관팀에 왔습니다. 저 혼자 남자라 살짝 후회도 했지만, 무르기에는 이미 늦었더라고요(웃음). 어쩔 수 없이 섬김을 시작했는데 가장 큰 행운이었습니다.” 한경진 집사는 묵묵히 그 자리를 지켰다. 꽃을 예쁘게 붙이는 일은 어려워도, 짐을 나르고, 장을 보고, 풀을 엮고, 화관 쌓는 일은 도맡아 할 수 있었다. 어느새 평택 화관팀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다. 한경진 집사에게도 평택 화관팀이 가장 중요한 사역이 됐다. “처음에는 어색했는데, 여자 집사님들의 수다를 듣는 것도 꽤 재미있습니다(웃음). 그 재미있는 이야기 안에 복음을 향한 순수한 마음들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에 동화되어서 러브소나타를 더욱 사모하게 되고, 기대하게 되었습니다.” 섬김은 섬김을 낳고… 평택 화관팀장 김성옥 권사는 12년째 러브소나타 화관을 만들고 있다. 올해 나이 76세다. 힘에 부칠 때도 있지만, 기쁨으로 꾸준히 섬기고 있다. 양재꽃시장에서 직접 꽃을 고르고, 일정을 조율하고, 매주 왕복 4시간 거리를 오가며 화관을 제작한다. 김성옥 권사의 섬김에 감동해서 평택 화관팀을 찾아온 성도가 한둘이 아니다. 섬김은 섬김을 낳는다. 김순분 권사도 김성옥 권사의 섬김에 감동해서 평택 화관팀을 찾아왔다. 그 추운 날 끼니도 제대로 못 챙기면서 섬기는 성도들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날 이후 평택 화관팀의 식사는 김순분 권사가 책임진다.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아침 식사와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등갈비찜, 짜장밥, 굴만두국, 묵은지 김치찜 등 메뉴도 다채롭다. 평택 화관팀 성도들이 “김순분 권사님 음식 먹으려고 매주 나온다”고 말할 정도로 음식 솜씨가 빼어나다. “다들 맛있게 먹어주셔서 감사할 뿐입니다. 작은 섬김에도 큰 기쁨을 돌려주는 분들이 계셔서 더욱 힘이 납니다. 하나님의 일은 누구든지, 어떤 일이든지 동참하면 기쁨을 배로 경험하게 됩니다. 평택 화관팀의 섬김을 보고 더 많은 성도가 러브소나타에 관심을 가지고, 섬겨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만든 화관을 쓰고 예수님을 만날 일본의 영혼들이 또 다른 이들을 섬기고, 복음을 전하는 통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러브소나타 화관의 의미 중앙 흰 꽃 3개: 성부, 성자, 성령 보라색 꽃: 회개 흰 꽃: 구원 의미: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을 통해, 성부, 성자, 성령이신 하나님의 은혜로 회개하고, 구원받아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뜻.
2024-03-23 제1484호
[신생사역팀을 소개합니다!] ‘원더풀 라이프’ 신생사역팀을 소개합니다! ‘원더풀 라이프’ 사역에는 결코, 은퇴가 없다! 6070 세대를 위한 ‘원더풀 라이프’ 총인구 중에서 65세 이상 인구가 차지하는 비율이 7% 이상이면 ‘고령화 사회’, 14% 이상이면 ‘고령사회’, 20% 이상이면 ‘초고령사회’로 분류한다. 현재 우리나라는 고령 인구가 약 19.2%를 차지하는 ‘고령사회’다. 내년에 ‘초고령사회’에 진입할 것으로 예측한다. 고령화 현상의 여파를 교회도 피해 가지 못한다. 하루빨리 교회에서도 초고령사회를 대비해야 한다. 사회선교본부 신생사역팀 ‘원더풀 라이프’가 출범한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6070 세대를 위한 사역팀 ‘원더풀 라이프’를 소개한다. / 김다애 기자 daa2@onnuri.org 이제는 노년 세대를 ‘제2의 주일학교’라고 부른다. 그만큼 교회에 고령 성도가 많고, 계속 늘고 있다. 온누리교회만 해도 60세 이상 64세 이하 성도가 약 1만 4천여 명, 65세 이상 90세 이하 성도가 약 1만 8천여 명이나 된다. 시니어 성도가 3만 명에 이른다. 더 무서운 변화는 사회도, 교회도 고령화 속도가 너무 빠르다는 점이다. 70세가 되면 사회에서 대부분 은퇴한다. 교회에서도 70세가 되면 공식적으로 맡은 직분에서 은퇴한다. 그런데 직분에서 은퇴한 이후에도 여전히 섬길 힘이 있다. 시간과 물질을 충분히 드려서 섬길 수 있다. 사역에는 결코 은퇴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실은 마음과 다른 것 같다. 목회데이터연구소에서 만 65세 이상 성도 2천여 명을 대상으로 ‘고령 교인 실태조사’를 했다. 이 조사에 따르면, 시니어 성도 38%가 ‘젊은 사람이 모인 곳에 가면 스스로 위축감을 느낀다’고 응답했다. 22%는 ‘교회에서 나에게 관심이 멀어지는 것 같다’고 응답했다. ‘고령 성도 10명 중 1명이 우울 증상을 보인다’는 결과도 있다. 현재 한국 교회에서는 시니어 성도들이 직분 혹은 사역에서 은퇴한 이후 역할이 없어서 외로움을 겪는 경우가 참 많다. 아직 사역을 감당할 체력과 능력이 충분한데도 말이다. 직분 혹은 사역에서 은퇴했다는 이유로 소외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신생사역팀 ‘원더풀 라이프’가 그래서 출범했다. 6070 성도들이 교회에서 소외되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끝까지 믿음의 경주를 이어가도록 돕기 위해서 만들었다. 그동안 은퇴 이후 역할을 찾도록 도왔던 ‘은빛날개’ 사역이 막을 내리고, ‘원더풀 라이프’가 새로 만들어졌다. ‘원더풀 라이프’는 6070 세대가 하나님이 주신 은사와 경험, 전문성을 살려서 이 땅에 사는 동안 끝까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도록 돕는 사역팀이다. 6070 세대들이 교회에서 그 아름다운 역할을 이어가도록 방법을 모색 중이다. 심리학자 에릭슨은 노년을 3단계로 구분했다. 65세 이상 74세 이하를 노년 초기, 75세 이상 84세 이하를 노년 중기, 85세 이상을 노년 말기라고 정의했다. 현재 온누리교회에는 노년사역이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원더풀 라이프’와 ‘시니어아카데미’다. ‘원더풀 라이프’는 노년 초기, ‘시니어아카데미’는 노년 중기를 대상으로 사역하고 있다. 사회가 고령화하는 만큼 교회에도 시니어 성도가 계속 증가한다. 이에 발맞춰 노년사역의 역할과 필요성이 매우 크고 중요해졌다. 노년 세대가 교회에서 경험과 전문성을 살려 믿음의 경주를 이어가도록 돕는 구체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을 찾아야 한다. 바로 그 역할을 ‘원더풀 라이프’가 감당한다. 6070 세대 성도들이 하나님 안에서 친밀한 교제를 나누고, 여러 사역팀과 협력해서 사역을 이어가도록 연결한다. 전도, 농어촌 선교, 이주민 선교, 탈북민 선교, 2000선교 등 사역팀과 연결하고, 일대일제자양육, 큐티, 가스펠프로젝트 등 양육사역에도 참여하도록 돕는다. 배드민턴, 탁구, 골프, 독서, 노래, 미술, 악기 배우기 등 6070 세대 성도들의 관심 분야를 파악해서 여러 취미활동을 할 예정이다. ‘원더풀 라이프’에는 6070 세대 성도 중에서 교회에서 계속 사역하기를 원하는 성도, 그동안 사회생활에 전념하느라 사역을 해본 적 없지만, 은퇴 이후 새로운 마음으로 교회와 성도들을 섬기고 싶은 성도, 교회에서 친밀한 친구 관계를 맺기를 원하는 시니어 성도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오는 3월 28일부터 4월 11일까지 매주 목요일 오후 7시 30분 서빙고온누리교회 두란노홀에서 열리는 ‘원더풀 라이프 세미나’에 참가하면 더 자세한 내용을 설명해준다. 문의: 02-3215-3434 사역칼럼 은퇴를 은퇴하십시오! 인생의 후반을 교회와 함께하는 성도들의 삶이 ‘원더풀 라이프’다. 인생의 황금기를 하나님의 부르심에 헌신하도록 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와 함께 나이 들어가는 성도들이 위축되거나 소외당하지 않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감당하는 영적 라이프 사이클을 늘려가야 한다. 나이가 들면 사회에서 은퇴한다. 교회에서도 모든 직분자가 공식적으로 70세에 은퇴한다. 그러나 은퇴 후에 남은 세월이 참 길다. 그 시간 동안 후배 성도들의 섬김을 받기만 할 수는 없다. 나이 들수록 더욱 의미 있는 활동을 해야 한다. 시니어 성도들은 한국 교회 발전의 주역들이다. 고난을 경험했고, 어려움과 시련을 이겨낸 세대다. 가정과 사회에서 부모님 잘 모시고, 자녀들을 잘 양육했던 국가 발전의 초석이었다. 그들이 사회에서 역할을 다하고 더는 설 곳이 없어지는데, 교회에서마저 그렇게 되는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 6070 세대가 되어도 건강하다. 가지고 있는 소중한 믿음과 지혜, 경험과 지식을 그냥 두기가 너무 아까운 게 사실이다. 6070 세대는 시간과 몸을 드리고, 물질을 드려서 섬길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사람들이다. 교회에 점점 늘어나는 시니어 성도들이 위축되거나 소외당하지 않고, 생명과 호흡이 있는 날까지 사명을 감당하도록 도와야 한다. 먼저, 목회 패러다임의 전환으로 세대 간 단절이 일어나지 않도록 교육이 필요하다. 세대 간 단절에서 오는 이질감이나 갈등으로 시니어 성도들이 교회에서 설 자리가 점점 없어지고 있다. 설 자리가 좁아진 기성세대가 ‘원더풀 라이프’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끝까지 감당하며 마음껏 역량을 발휘해야 한다. 김형석 명예교수(연세대학교)는 “주위 사람들을 보니 60~75세 무렵에 가장 창의적이고, 아름다운 시기를 보낸다. 좋은 책도 바로 그 시기에 썼다”고 말했다. 교회에도 초고령화 현상이 시작되었다. 2028년이 되면 한국 교회를 이어가는 주력 세대가 60~70세가 된다고 한다. 고령화된 한국 교회는 우리 앞에 실존하는 문제로 다가왔다. 비켜 갈 수 없는 현실이다. 하나님은 시니어 성도들을 소명의 일꾼으로 세우시기를 원하신다. 시니어 성도들은 부흥의 시대를 경험했고, 교회를 통해 일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를 본 세대다. 신앙의 연륜이 쌓여있고, 시간과 몸을 드리는 여유도 있다. 부르심을 따라 물질을 드려 섬기고 싶은 헌신도 있다. 교회는 시니어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어떻게 쓰임 받을 수 있게 할지를 고민해야 한다. 시니어 성도들을 그냥 나이 들게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부르심을 따라 살도록 믿음으로 교육하고, 훈련 시켜서 영적 라이프 사이클을 연장해 줘야 한다. 모세는 80세에, 갈렙은 85세에 부르심을 받았다. 시니어 성도들도 나라와 민족과 주의 몸 된 교회를 위해 다음 세대에게 믿음의 유산을 물려줘야 한다. 하나님이 시니어 성도를 위해서 준비하신 ‘제2의 부르심’을 받고, 주체적으로 일어나 부흥을 감당하는 세대가 되어야 한다. 세상에 노인이 많아지고, 개인의 삶에서 노년기가 더욱 길어지고 있다. 다르게 표현하면 지혜로운 어른들이 많아져서 다음세대에 좋은 영향력을 줄 수 있다. 어른은 지혜로운 사회의 주인공이다. 노년 초기에 존경받는 어른으로 살도록 교회에서 교육받고, 새로운 삶을 준비하면서 기름 부으심이 넘치는 축복을 받기를 바란다. 그러면 노년 중기와 말기에도 아름답고 존경받는 어른으로 세워질 수 있다. 6070 세대가 은퇴를 은퇴하는 원더풀 라이프를 소망한다. / 심길섭 장로(강촌공동체, 원더풀 라이프 담당)
2024-03-16 제148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