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황(李滉, 1501년 음력 11월 25일~1570년 음력 12월 8일)은 조선 명종·선조 시대의 명신. 정치보다는 학자 지향형 인물이다.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퇴거계상[退居溪上]의 줄임말)·도수·퇴도(退陶), 본관은 진보(眞寶)이며,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진사(進士) 이식(李埴)의 아들이다. 조선 정치사에서 특히 남인 계열의 종주이다.
경상북도 경북 예안현(오늘날의 안동시 예안면)에서 이식의 7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528년에 소과에 입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이듬해 문과에 급제하였다. 1534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였고, 부정자(副正字)· 공조판서· 우찬성 등을 거쳐 68년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을 지낸 이듬해 낙향하여 학문과 교육에 전념하였다.
이언적(李彦迪)의 주리설(主理說)을 계승, 주자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발전시켜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 등 주리론적 사상을 형성함으로써 조선 후기 영남학파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인간의 순수이성은 절대선(絶對善)이고 여기에 따른 것을 최고의 덕(德)으로 보았다. 도산서원(陶山書院)을 창설하여 후진 양성과 학문 연구에 힘썼다. 문묘와 도산서원 등, 전국의 수십 개 서원에 배향되었다.
이황의 학문적 근본 입장은 진리를 이론에서 찾는 데 있지 않았다. 오히려 진리는 평범한 일상생활 속에 있다는 것이 그의 신념으로 지와 행의 일치를 주장, 그 기본이 되는 것이 성이요, 그에 대한 노력으로서 ‘경’이 있을 뿐이라 하였다. 실로 그의 학문·인생관의 최후 결정은 이 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 이 경을 70여 생애를 통하여 실천한 것이 이황이었다. 그는 문학·고증학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그 사상·학풍이 후세에 계승되어 영남학파를 형성, 유학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황의 학문과 사상에 대한 연구는 오늘날 ‘퇴계학’(退溪學)으로 통용될 만큼 국내외적으로 매우 활발하다. 1970년 서울에 퇴계학연구원이 창립되었고, 73년 경북대학교에 퇴계학연구소가 생겼으며, 〈퇴계학보〉라는 논문집이 발간되고 있다. 저서에 《퇴계전서(退溪全書)》, 시조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글씨 〈퇴계필적(退溪筆迹)〉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