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교 전도사는 황해도 서흥군 율리면 신방리에서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 출생하였다. 사범학교를거쳐 성화신학교를 졸업하였다. 감리교 연회의 서기로 있으면서 평양 남산현교회 전도사로 봉직하던 중 6.25사변을 만나 1950년 7월9일 공산당에게 체포되어 평야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평양사범 중퇴 성화신학교 졸업 성화신학교 부설 고등성경학교 교사 남산현교회 청년부 전도사 서부연회 사무일
민족의 힘을 교육으로 끌어 올리려는 목적의식을 가지고 당시 수재들만 입학이 가능하다는 사범학교에 진학했으나 고학년으로 올라갈 수록 그의 교육관이 바뀌었다. 일제 치하에서 공립학교 교사가 된다는 것은 한낱 일제의 사주에 놀아나는 꼭두각시가 된다는 것을 알고서 번민하다가 일본의 우민화정책에 맹종하는 제자를 육성할 수 없다고 판단 졸업을 몇달 앞두고 세인의 선망의 대상이 되는 사범학교를 중퇴해 버리고 말았다.
자기학문의 사상을 비교적 자유롭게 논술할 수 있는 대학으로 가서 교수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일본에 가서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중 2차대전을 일으킨 일본은 길거리에서 젊은이만 보면 모조리 인간사냥을 했다. 마음을 조리면서 시국을 관망하던 그는 귀국하여 신앙심 독실했던 김성실이란 처녀와 결혼했다.
본래 기독교인이 아니었고 당시 3천만 인구에 10만에 불과한 기독교에 대해서 부정적 시각을 가지고 있던 그는 아내가 전해준 김익두목사의 설교집을 탐독하든중 설교속에 민족정신이 번뜩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책을 돌려주려고 처가 마을에 갔다가 송홍근목사의 부흥사경회에서 감동을 받고 인생관이 예수 인생관으로 뒤집어지는 역사가 일어나 1944년 11월에 예수를 믿어 1945년 성화신학교에 입학해서 해방을 맞아 계속 수업을 해서 졸업했다. 배덕영교장의 배려로 성화신학교 부설 고등성경학교와 남산현교회 청년회에서 학생들에게 공산주의 유물사관을 호되게 비판하고 경계를 시킨 것이 내무서에 차곡차곡 보고되었다.
서부연회에 사무일을 맡는 등 학교일, 교회일, 연회일까지 맡아 동분서주하는 중 6.25가 터졌다. 이전도사는 연회일로 평양에 숨어있는 박대선박사와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는 이유로 1950년 7월9일 체포하여 박박사의 은신처를 자백받으려고 고문을 당해 갈비뼈가 부러지면서도 혀를 깨물며 입을 열지 않았다.
"죽어도 교수들 은신처는 밝힐 수 없다"
고문당하고 치료도 못하여 혼수상태에서 내무서 유치장에서 26세의 꽃다운 나이에 하나님 나라로 옮겨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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