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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인명사전  작성일  2006-12-28
 제목  찰스 피니(Charles Finney, 1792~1875)
 주제어  [외국인] 미국부흥가
 자료출처    성경본문  
 내용

19세기 미국 대부흥을 가져온 사람.

그는 부흥의 의미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첫사랑을 회복하는 것이고, 죄인들에게는 과거를 뉘우치는 것임을 보았다. 퇴보한 교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속한 것들을 주의하여 기울이도록 일깨우고 교정하였다. 믿는이들 안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이 회복되고 확대되는 것과 그들의 생활 안에서의 영광스러운 간증을 통해서 하나님이 죄인들을 굴복시킨다고 주장하였다.

나는 1792년 8월 29일 코네티컷 주 리치필드 군의 와렌이란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영국 소설가의 소설을 애독하셨던 아버지는 소설 속의 인물의 이름을 따서 내 이름을 찰스 그랜더슨이라고 지으셨습니다. 우리 집은 가난했고, 믿음은 별로 독실한 편이 못되었습니다. 나는 성장하면서 우리 집에서 기도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성경도 내 나이 29세 때 법률에 나오는 모세오경에 대한 궁금증 때문에 사서 읽게 된 것이 처음이었습니다.

나는 문학 분야에 뛰어났고, 고전어를 연구했습니다. 그럼에도 나는 나를 지도해 주던 선생님의 권고로 대학에 갈 수 있는 기회들을 포기했습니다. 훗날 학교를 같이 설립하자는 그 선생님의 제안도 어머님의 병환으로 인해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저의 길들이 막혀진 것 같았지만, 부모님의 권유로 들어선 그 법률가의 길에서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처음 대하게 된 것입니다.

성경을 읽을수록 나는 내가 죄인임을 점점 더 느끼게 되었습니다. 겉으로는 냉담한 척했지만 내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어느덧 간절히 하나님을 찾기 시작했고, 그러던 어느 날 구원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값없이 주신 "선물"임을 깨닫고서, 이제 죄를 끊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한 결정을 내린 후로는, 별로 선하지 못한 의뢰인들의 법적 탈출구나 만들어 주는 일에는 더 이상 관심이 없어졌습니다. 변호사 일을 계속하는 것이 내키지 않았던 것입니다. 돈을 많이 벌 생각도 없었고, 그것이 어떤 것이든 세상적인 즐거움과 재미에는 흥미를 잃어갔습니다. 반면 이 세상의 어떤 수고도, 죽어가고 있는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구원이 있음을 알리근 그 일보다 더 가치있는 것은 없어 보였습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영혼의 가치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나는 또 한 번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소송 의뢰를 맡은 변호인으로서, 그분의 탄원을 사람들에게 호소하는데 나의 일생을 드리기로 말입니다.
나는 내가 맡은 그리스도의 소송에서 이기고자 하였고, 설교의 내용에 그 길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내 눈에는 그리스도의 소송에는 능력있는 대변인이 참으로 드문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제까지 내가 보아온 목사들이 그리스도의 의를 호소하는 것처럼 어떤 변호사가 자기 소송 의뢰인의 무죄를 변호한다면, 단 한 건도 승소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 묵상할 때면, 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내고자 노력했습니다. 성령님을 의지하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으로 생각되는 한 제목을 택하곤 했습니다. 그런 후에 그 설교를 준비하면서 많이 기도했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나아가 설교로써 넘치도록 쏟아놓곤 했습니다. 그러한 나의 설교는, 설교 내용이나 감상하며 설교자에게 칭찬이나 던져 주던 나태한 회중들에게 강력한 찔림이 되었습니다. 나는 설교를 통해 죄인들을 하나님 앞으로 이끌어 오고자 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께로 나아오거나, 격렬한 반대를 보였습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에 죄인들의 완악한 마음들이 부서져서 그리스도 앞에 무릎 꿇었습니다. 술집이 기도회 장소로, 호텔이 부흥의 장소로 돌변하고, 도시 전체가 회개의 물결에 휩싸이며, 지속적인 기도의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반면에 끝까지 반대하던 자들 중에는 졸도로 죽거나, 침대 위에서 죽은 채로 발견된 목사도 있었습니다.

강력한 복음 전파와 풍성한 기도에 힘입어 부흥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앤월프로 갔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술집을 경영하던 사람의 손에 교회 열쇠가 넘어가 있었습니다. 상황이 험악했지만, 나는 매일 이른 아침 숲속에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그 상황을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기도로 주님의 은혜를 구하지 않고는 힘차고 능력있는 설교를 할 수도 없었고, 나의 언변이나 지혜로는 단 한 사람의 영혼도 구할 수 없음을 절실히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나의 설교를 통해 드디어 그 마을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쏟아져 내리는 우박과 같은 강렬한 사랑을 쏟아부으시는 것만 같았습니다. 모임 장소를 되찾았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왔습니다. 에반즈 밀즈, 앤월프, 가버너, 유티카, 로마... 가는 곳마다 수백 명씩 수천 명씩 주님께 돌아오는 부흥이 있었으며, 그 부흥 뒤에는 끊임없는 기도와 그를 통한 성령의 특별한 도우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계속해서 부흥이 일어나자 무시 무시한 반대도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나와 내쉬 감독(나의 기도의 동역자)의 화상을 만들어 불태우기도 했습니다. 예배 모임중에 소란을 피우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많은 음모와 거짓말과 거짓 보고가 난무했습니다. "그는 인간을 모두 악당이라고 부른다", "능력에 찬 부흥회라고 떠들지만 결과는 별로 없거나 전무하다", "젊은 개종자들을 분별없이 이용한다", "어중이 떠중이에게 연설을 하게 하며 난잡한 모임 속에서 기도들을 한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비난에 대답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았습니다. 또 그럴 의사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반대 세력을 진압해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의 말씀이 있었기에, 오직 신뢰로써 나를 그분께 맡기고 그분의 약속을 붙잡고 한 곳만을 바라보며 전진해 나갈 뿐이었습니다. 나는 부흥을 위해서 그러했던 것처럼 반대에 대해서도 오직 그분께 기도할 뿐이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반대자들의 공격을 뒤엎으셨고, 주요 도시들에 있는 교회 문들이 내 앞에 열리도록 나의 이름을 하나님의 일터로 널리 퍼지게 하셨습니다.

복음 사역을 시작한 지 15년째 되던 해의 일이었습니다. 그때 나에게 교수직의 제의가 들어왔는데, 나는 젊은 학생들을 그리스도께로 이끌 목적으로 그 제의를 수락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학교의 설립자가 파산해버려 학교는 부채를 떠안게 되었고, 나 역시 그해 겨울 동안 나의 가족을 부양할 길이 없었습니다. 최후의 방법으로 나는 여행용 가방을 팔아서 그것으로 한 마리 암소를 사야만 했습니다.

가방을 팔던 그 날, 나는 하나님께 기도로 이 사실을 아뢰고 모든 것을 그분께 맡겼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집에 도착했을 때, 하나님의 응답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집으로 날아온 한 통의 편지에 200불의 돈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 돈을 보내준 형제는 그 뒤로도 몇해 동안 매년 600불씩 나의 필요를 채워 주었습니다. 학교의 부채도 만 이천 권이나 팔렸던 나의 저서 <피니의 부흥 강의>에 감명받은 영국인들에 의해 해결되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교수직을 수락한 뒤에도 나의 사역을 강의실에만 한정시키길 원치 않았습니다. 대학에서는 매해 겨울에 부흥회를 자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고, 나는 계속적으로 복음을 전함으로 하나님과의 맹세를 충실히 지켜왔으며, 부흥의 물결은 계속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의 부흥사로서, 목사로서, 저술가로서, 교수로서 나를 쓰셔서 많은 영혼들을 그분께로 이끌게 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나를 도구로 사용하심으로 수많은 죄인들을 주님께로 인도하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나는 나 자신이나 지도 교수나 다른 목사들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오로지 성경을 나의 교본으로, 성령님을 나의 교사로, 기도를 나의 힘으로 삼았고, 따라서 그분의 사역의 놀라운 도구로 사용되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한 세기의 3/4에 달하는 나의 생애가 다하기까지 그분의 일은 계속되었으며, 주님의 일하심으로 50만 명의 영혼들이 그리스도께로 나아왔습니다.

내가 고백할 수 있는 것은 나를 이끌어 준 것은 나의 지혜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나의 무지와 무력함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계속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분의 인도하심만을 간절히 구했고, 그분께서는 성령으로 나를 친히 이끌어 주셨습니다. 따라서 나는 이 모든 사역의 열매들을 그분의 것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게 다시 인생의 기회들이 주어진다해도, 나는 40여 년이 넘도록 이 부흥에 하나님의 도구로 쓰인 이 일에 다시 쓰이고자 간절히 소망할 것입니다.


라이즈업 코리아― 박용규교수의 부흥현장을 가다] (22) 찰스 피니의 사역현장


2차 대각성 운동은 19세기 전반기 미국의 기독교를 특징 짓는 대표적인 신앙운동이었다.
그 주인공은 찰스 피니(1792∼1876)다.

그의 부흥관에 동의하든,동의하지 않든 피니의 부흥 운동이 미국 종교사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1830년대 그를 통해 한창 부흥 운동 일어나고 있을 때 뉴욕의 서부는 ‘불타는 지역’(The Burned-over District)이라는 별명이 붙여질 만큼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났다.

성령의 역사는 이 지역 주민이 모두 주님께 돌아오는 바람에 더 이상 비신자들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회자됐을 만큼 강력했다.

찰스 피니는 29세 때 강력한 회심을 경험했다.

뉴욕 애덤스에 있는 벤저민 라이트 변호사 사무실에서 실습훈련을 받던 피니는 1821년 10월10일 화요일 마을 북쪽의 숲속에서 정오가 지날 때까지 기도하던 중 그의 생애에 ‘가장 깊은 영적인 환희’를 경험했다.

이 성령 체험은 단순히 환상이 아니라 성령의 실제적 현시였다.

다음 날 사무실에 출근한 피니는 바니 집사가 자신의 재판이 오늘 아침 10시인 것을 기억하느냐고 묻자 “바니 집사님,저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소송을 맡았으므로 귀하의 소송을 맡을 수 없다”며 거절했다.

이렇게 해서 그의 생애는 새로운 길에 접어들었다.

피니는 자신의 교회 담임목사인 게일 밑에서 목회 후보생으로 실습을 시작해 1823년 12월30일 세인트 로렌스 노회에서 강도사 자격을 얻고 1824년 전도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당시에는 가능한 일이었다.

목사 안수를 받은 피니는 1824년 3월17일 제퍼슨 상부 지역 여성선교회의 부탁을 받고 뉴욕 서부지역 제퍼슨 에번스 밀스 마을의 작은 교회에서 설교를 시작했다.

피니의 열정적인 설교는 교회 교인들에게 놀라운 반응을 일으켰다.

그는 기회가 닿는 대로 학교나 교회,혹은 회심한 저명 인사의 집에서 집회를 열었고 그때마다 참석자들은 모두 은혜를 받았다.

에번스 밀스로부터 21㎞쯤 떨어진 앤트워프 근처 교회가 없는 곳에서 열린 집회에서도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

한 번도 예배를 드려본 적이 없던 곳에서 피니가 인도하는 집회에 참석한 회중이 설교를 듣고 앉아 있던 자리에서 밑으로 나동그라지기 시작했다.

참으로 강력한 성령의 역사였다.

피니의 말을 직접 빌린다면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나동그라지더니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며 울어댔다.

설사 양손에 검을 가지고 그들을 내리쳤다 해도 그들이 나동그라지는 것만큼 그렇게 빨리 넘어뜨리지 못했을 것이다.

정말 거의 온 회중이 무릎을 꿇거나 엎드려 있었다.

” 사람들이 소리 높여 부르짖는 소리에 피니의 설교가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이날 집회는 다음 날 오후까지 계속되었다.

1824년 10월5일. 게일이 담임하는 교회의 신실한 자매 리디아와 결혼한 피니는 뉴욕 서부 일대에 부흥회를 인도하며 명성을 날리기 시작했다.

부흥의 불길은 그가 집회를 인도한 퍼치 강,브라운스빌,래이빌,구버넬 지역으로 번져갔다.

1825년 8월 피니가 인도한 뉴욕주 중부 오네이다 카운티 웨스턴에서의 집회,이어 열린 로마 집회에서 놀라운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다.

특히 로마 저녁 집회 때는 죄를 깨닫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임했다.

회개의 역사가 너무나 강하게 나타나 회중을 진정시켜야 할 정도였다.

피니의 집회로 인해 로마의 모든 주민이 그리스도를 영접했고 로마는 성령 충만한 도시로 변했다.

성령의 역사가 이 지역에 얼마나 강하게 나타났던지 유티카의 한 보안관은 공무차 로마를 방문했다가 주민들이 모두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에 압도된 나머지 거의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을 발견했다.

그 보안관은 유티카로 돌아오자마자 회심했다.

부흥의 역사는 참으로 놀라웠다.

회심한 보안관이 유티카의 어느 호텔에 묵고 있을 때 호텔 주인과 그의 가족을 위해 기도하자 곧 그들이 회심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이후 유티카에서 가장 큰 이 호텔에서는 하룻밤 묵고 가던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강하게 의식하고 도시를 떠나기 전 회심하는 역사가 이어졌다.

부흥의 불길은 곧 뉴욕 동부 전역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1830년 피니는 리딩 랭커스터 컬럼비아를 거쳐 다시 뉴욕시로 향했다.

그가 가는 곳마다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임했다.

어번,뉴욕주의 버펄로,로드아일랜드주의 프로비던스,보스턴,뉴욕도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부흥의 영향으로 로체스터의 경우 인구는 3배나 증가했으나 범죄율은 3분의 1로 줄었으며 악의 요람이었던 극장이 문을 닫았고 다시 극장이 세워지기까지 7년이 걸렸다.

부흥 운동 시기에 회심했던 이들이 도시의 지도자들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노예 해방 운동을 촉진하고 여성의 지위를 고양시켜 기독교의 대사회적 영향력을 확대했다.

여성과 흑인을 남성이나 백인과 함께 대학 강의실에 수용하기 시작한 것도 피니였다.
 
9월10일,나는 가장 부흥의 불길이 가장 강렬히 타올랐던 뉴욕주 서부에 위치한 ‘불타는 지역’을 찾아나섰다.

뉴 헤이븐에서 5시간은 족히 걸리는 거리였다.


91번 도로를 타고 북쪽으로 향하다가 스프링필드에서 다시 90번 도로를 타고 서쪽으로 달리다보면 유티카(Utica) 로마(Rome) 오네이다(Oneida)를 만난다.

바로 이곳이 피니의 부흥 불길이 강력하게 타올랐던 진원지였다.

이들 지역은 이전에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지만 부흥의 진원지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를 흥분케 했다.

이 역사의 현장에서 2세기를 거슬러올라가 훤칠한 키에 금발의 미남이었던 찰스 피니를 만나고 싶었다.

이들 지역에서 나는 피니가 남긴 영적 각성의 발자취를 피부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은 참으로 대단한 기쁨이었다.

유티카와 로마,오네이다는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휩쓸었던 지역답게 인구에 비해 큰 교회가 매우 많았다.

이들 교회들은 아직도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오네이다에서 가장 오래된 감리교회는 주일에 2부 예배를 드리고 있었고 로마의 성공회 교회는 주중에 점심을 무료로 제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가장 오래된 장로교회는 주중에 어린이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다.

이렇듯 ‘불타는 지역’에는 아직도 곳곳에 교회들이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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